“그래서, 삼바가 대체 뭐야?”
이런 질문 앞에선 매번 말을 잃는다. 오래 품은 짝사랑도 소용이 없다. 이 장르의 역사, 퍼커션의 켜가 빚는 폴리리듬, 자주 쓰이는 악기나 음계 따위를 더듬거릴 뿐, 명료한 한 줄 요약에는 늘 실패해 왔다.
어쩌면 오래된 아름다움의 숙명 아닐까. 말뜻을 구하는 게 애호가의 일이라면 그로부터 도망치는 건 예술가의 일이므로. ‘예술’이나 ‘음악’처럼 거대한 단어, ‘재즈’나 ‘소울’처럼 역사가 짙게 밴 낱말들도 그렇게 미끄러져 왔다.
그러니 우리에겐 합의된 정의 대신 저마다의 이념만이 남는다.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는, 일면의 느낌만을 포착하는 문장들.
93년의 Caetano Veloso도 그런 문장들을 썼다. 설명이 아닌 노랫말로.
한때 그는 삼바의 반대편 같았다. 보사 노바로 데뷔하나 싶더니 1세계의 록과 사이키델릭을 들여왔다. 급진적 문화 운동 Tropicália는 브라질을 아방가르드로 헤집었다. 전통을 옹호하는 이들에겐 마뜩찮은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고향 Bahia가 있었다. 온갖 장르를 먹어치우겠다는 음악적 식인주의(Canibalismo Musical)에는, 뭘 먹어도 브라질로 소화해낼 수 있단 자신감이 함께였다. 그런 그가 쉰 살이 넘어 삼바에 대해 썼다니. 답을 구하는 심정으로 읽었다.
“슬픔이 주인이야. 어두운 피부 위 투명한 눈물.”
Veloso는 삼바의 역사를 이렇게 간추린다. 시작은 노예 무역이었다. 설탕 농사로 끌려온 흑인들의 품에는 아프리카의 리듬이 있었다. 여기에 원주민의 토속 음악, 유럽의 화성이 섞여들었다. 폴카와 탱고의 영향을 받은 쇼루, 마시시 같은 장르가 등장했다. 그리고 삼바가 태어났다. 도시의 술집들을 아지트 삼아 새벽까지 지어 부르던 춤곡이었다.
“삼바는 아직도 태어날 거야.”
삼바는 점점 종류를 늘려 갔다. 라디오를 타고 흐를 땐 팝이 됐고(Samba-cancão), 언덕 위에서는 가난한 이들의 위안이었다(Samba de Morro). 카니발의 중심에 서면서 빠르고 격해졌지만(Samba-enredo), 그게 싫었던 이들은 소규모의 삼바를 다시 찾았다(Pagode). 그렇게 삼바는 매번 새 얼굴로 다시 태어났다.
“삼바는 기쁨의 아버지, 고통의 아들.”
삼바는 슬픔으로 쓰고 환희로 춘다. 아무리 차분한 삼바도 타악기를 두드린다. 독창은 메기고 받으며 제창으로 불어난다. 함께의 고양감이 부르는 카타르시스. 고대 그리스 비극이 했던 일을 삼바는 웃는 얼굴로 해낸다.
“변화를 만드는 거대한 힘.”
Veloso는 삼바의 이념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것이 ‘삼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일 수 있을까. 답 없는 질문에는 종종 시가 답이 되기도 하므로, 그런 기대로 가사를 옮겼다.
A tristeza é senhora
Desde que o samba é samba é assim
A lágrima clara sobre a pele escura
A noite, a chuva que cai lá fora
슬픔이 주인이야
삼바는 삼바니까, 그런 거지
어두운 피부 위 투명한 눈물
밤, 저기 밖에 내리는 비
Solidão apavora
Tudo demorando em ser tão ruim
Mas alguma coisa acontece
No quando agora em mim
Cantando eu mando a tristeza embora
고독이 두렵게 해
시간을 끌며 너무나 나빠지는 모든 것
하지만 무언가가 일어나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나는 슬픔을 내쫓아
O samba ainda vai nascer
O samba ainda não chegou
O samba não vai morrer
Veja, o dia ainda não raiou
O samba é o pai do prazer
O samba é o filho da dor
O grande poder transformador
삼바는 아직도 태어날 거야
삼바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
삼바는 죽지 않을 거야
봐, 날이 아직 밝지 않았어
삼바는 기쁨의 아버지
삼바는 고통의 아들
변화를 만드는 거대한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