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렇게 그리웠던가

가끔 꿈에서 아빠를 만난다. 지금은 요양병원에 있는, 기억도 시간도 천천히 잊어가는 사람을. 그리 사랑했던가. 아니면 아버지란 낱말을 대단히 섬긴 적이 있었던가. 둘 다 아니었으나 꿈은 꾼다. 일하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빈 막걸리 병을 숨기던 사람. 금요일이 되면 기숙사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감자를 한 솥씩 삶아내던 사람. 나는 그를 닮았다. 나는 낮술을 좋아한다. 그의 18번인 나훈아를 듣고 […]

첫 마음을 쓰자

1. 근황 듣고 쓰는 게 무서웠다. 좋은 글을 바랄수록 더 그랬다. 단단한 논증과 단정한 말씨로 눌러 쓴, 힘껏 다정한 문장들을 갖고 싶었다. 의미를 벼려 좋아하는 리듬과 온도에 닿고 싶었다. 그러려면 기력이 필요했다. 몸을 덥히고 숨을 고를 여유가 필요했다. 처음엔 그럴 시간이 없었고 나중엔 그럴 자신이 없어졌다. 느낌은 단어를 밟고 피어나는 것이기도 해서, 쓰지 않으니 사랑하는 […]

비행기가 이륙하면

1. 비행기가 이륙하면 죽음을 생각한다. 이번 추석엔 비행기로 고향을 오갔으니 이미 두 번. 엄마는 과로와 운동 부족과 가족의 내력으로 높아진 내 혈압을 수시로 쟀다. 혈압에 좋다는 자주색 양파즙을 먹이기도 했다. 덕분에 세 번, 네 번, 다섯 번. 명절은 어쩌면 식탁 풍경. 흰쌀밥 위에 가시 바른 갈치살이 얹혔다. 이젠 애도 아닌데. 포슬한 부채감이 끈적하게 입 안을 […]

2019/2020

결산 없이 서른을 맞았다. 3월의 절반이 지났다. 생의 결산은 여태 어려워 노래만 늘어놓는다. 사랑 대신 사람으로 들었다. 사람이 너무 어렵고 귀하고 우리는 그걸 자주 까먹는다. 사람이 구원이고 또한 저주일 때, 나쁜 쪽으로 기울지 않는 귀를 가질 수 있다면. 어릴 땐 슬프거나 아프면 울었는데. 요샌 존엄한 인간을 보면 운다.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정세랑, 2016)들. 《동백꽃 필 […]

풀 물병 크로키 숲

1.풀을 읽는 눈빛 입사와 함께 회사 책상에 수경 식물을 들였다. 캘린더를 사나흘 간격으로 어슷썰어 물을 갈았다. 물이 줄고, 뿌리가 자라고, 날이 이어졌다. 마른 뿌리 두엇은 이미 버렸다. 생장에는 이유가 없고 시드는 일도 다르지 않다. 무구함은 어떤 눈에만 지극하다. 사멸은 어떤 눈에만 시리다. 의미는 눈빛으로 맺힌다. 풀을 곁에 두면서 그런 눈빛을 소망했다. 2.물병만 한 생애 한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