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개의 당위
두 개의 당위가 있다. 우선 쓸모 있는 글을 써야 한다. 그러나 그런 핑계로 학문적인 뻥을 쳐선 안 된다. 둘 다 지키기는 물론 어렵다. 하필 손에 쥔 게 철학과 음악이어서 한 걸음만 잘못 딛어도 무용한 뻥이 된다. 더 절실하고 잘하는 하나만 해도 성공이다.
학생의 미덕은 뻔뻔함이어서, 이번 학기엔 신시사이저에 관한 논문으로 뭉게뭉게 욕심을 키우고 있다. 풍선이 불어날 때의 자족과 언젠가 펑 터지고 말 거란 자조가 교차한다. 가끔은 먹고 살 고민마저 밀물처럼 찾아든다. 작은 마음 하나조차 글로 정돈하지 못했다.
2. 두 개의 역: 강남역과 구의역
끔찍한 사태를 두고 끔찍한 말들이 오간다. 강남역 사건에서 여성 문제를 떼어놓으려는 분투를 본다. 철학 하는 지인조차 그랬다. 사건으로부터 여성 문제가 연역되거나 강력하게 귀납되지 않으면 비약하지 말라는 취지의 글을 읽었다. 힐난하지는 않았다. 그런 신중함을 얼마간 존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아니다. 역사와 사회를 떼어낸 진단의 해로움에 반대한다. 설령 여성 문제를 말하는 모두의 추론이 틀렸다고 해도, 다들 정신 차리시란 핀잔보단 그런 추론을 추동한 힘을 숙고하는 일이 먼저다. 이게 다 “페미 나치”와 “꿘”들의 선동 탓이라는 안일한 설명으론 부족하다. 그들은 늘 선동해왔으며, 그러니 하필 지금에야 선동이 먹혀든 이유를 가늠해야 한다.
우연한 죽음이라고 했다. 단 한 명의 희생자가 될 확률들을 곱해나간 결론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죽음을 “우연히 살아남았다”로 고쳐 적는다. 확률들을 곱하고 곱해도 자신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번화가, 강남, 새벽 1시, 공중화장실 따위로 조건을 좁혀가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감각, 모든 조건에게서 도망쳐도 여성이란 것만은 피할 수 없다는 감각, 이 확률 게임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시행 횟수를 늘리고 있다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도를 달리하며 비슷하게 겪어온 폭력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없었던 문제를 새로이 연역하는 대신 이미 있었던 문제를 연상했을 것이다. 연역이 아닌 연상이 감각들을 환기했을 것이다.
나쁜 문장인 걸 알면서도 “것이다”를 붙여야만 했다. 가져본 적 없는 감각과 기억에 대해선 그래야만 한다.
그런 죽음이 다른 역에서도 있었다. 물론 쉬이 묶어선 안 될 죽음들이다. 정확하게 싸우기 위해서는 연대의 순간에도 차이에 예민해져야 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겹쳐졌다. 차 없는 발들이 닿는 곳에서, 희박하다는 그 확률이 다시 힘없는 사람을 향했다. 가난은 그나마 이해할 만했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의 마음을 몰랐다. 기껏해야 “것이다” 몇 개나 붙여볼 수 있었다. 그들의 감각을 충분히 상상하기도 전에 애도할 일들이 쌓여간다. 밀려가고 잊힌다.
3. 두 개의 과제
철학의 일과 감성팔이의 일이 있다. 감각의 현재와 미래를 뻥치지 않고 보여야 하고, 그걸 귀에 감기는 말로 설득해야 한다. 책임질 수 있는 당위를 내놓아야 하고, 그걸 곳곳의 삶에 밀어 넣어야 한다. 삶을 까먹지 않은 철학과 엄밀함을 까먹지 않은 이야기. 역시 쉽지 않다. 내가 뭘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의 재능도 없을지도 모르고 한 줌 재능을 버틸 여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신중하게 쓰고 싶다. 그런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거르고 또 거른 뒤에도 쓰려면 더 많이 써야 한다. 거르고 거른 뒤에도 살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쓴 글을 옮기고 싶었지만 여태 글을 정리하지 못했다. 각론은 제하고 다짐과 제안만 두서없이 남긴다.
우리는 소비자를 넘어 시민이 되자고, 살고 싶은 세계를 저마다 상상하자고, 그 세계에 견주어 서로의 오늘을 살피자고, 심판이 아닌 선수가 되어 그런 세계를 함께 만들자고, 만들어질 세계보다 세계를 만드는 우리를 긍정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