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을 읽는 눈빛
입사와 함께 회사 책상에 수경 식물을 들였다. 캘린더를 사나흘 간격으로 어슷썰어 물을 갈았다. 물이 줄고, 뿌리가 자라고, 날이 이어졌다. 마른 뿌리 두엇은 이미 버렸다. 생장에는 이유가 없고 시드는 일도 다르지 않다. 무구함은 어떤 눈에만 지극하다. 사멸은 어떤 눈에만 시리다. 의미는 눈빛으로 맺힌다. 풀을 곁에 두면서 그런 눈빛을 소망했다.
2.
물병만 한 생애
한글을 그랑프리 위인전으로 익혔다. 말의 뜻과 생의 가치를 동시에 배웠다. 서른 명의 죽은 한국인과 서른 명의 죽은 외국인. 눈빛과 무관하게 대단한 삶이라고 했다. 그러고 싶었다. 나의 의미와 세계의 의미를 겹쳐놓고 싶었다. 무서웠다. 위인전의 도입부와 닮지 않은 유년을 의심했다. 장래 희망을 바꿔가며 줄거리를 달리 썼고 그때마다 세계는 좁아졌다. 온 우주였던 영토가 한국으로, 나 하나로, 이젠 물병 하나로. 물병 너머 의미를 잊고 있다. 노동하지 않는 말, 옳고 요긴하고 선량하고 아름다운 말과 멀어지고 있다.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어떤 생애는 물병으로 수축한다.
3.
되는대로 크로키
서른이 되면 외롭지 않다고들 했다. 눈 뜨고 돈 벌고 가끔 웃다 잠드는 하루가 좀 부러웠다. 기분에 대해 쉬이 쓰지 말자고 다짐하던 때였다. 다만, 다만, 하고 매달리는 심정이 문장의 리듬이 되는 게 싫었다. 그러나, 그러나, 하고 쉽게 날 세운 역접도 아니었으면 했다. 연접으로 살게 된 지금은 느낌에 대해 되는대로 쓰자고 다짐한다. 더 드물고 희미해질, 느낌의 크로키에서 간신히 시작될 말들을 생각하면서. 접속사도 가리지 않고 마구 휘저어 긋는 생채기들. 물병의 소요를 어림하면서.
4.
가끔 숲
혼자 웅크린 다음의 온기를 상상해본다. 꽃 없는 풀에서도 뜻을 맺는 눈빛이라면 그 곁도 얼마간 따뜻하겠지. 온기를 나누는 무리, 호들갑의 공동체를 떠올린다. 취한 서로가 서로의 곁일 때, 물병들의 묶음은 얼핏 연못이다. 풀을 보는 풀들은 가끔 숲이다. 그런 우리라면 쓰는 미래를 다짐할 수 있다.
Mercedes Sosa, 〈Hermano Dame Tu M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