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 고블린

말하기를 한참 망설였다. 노래가 좋았고, 이유를 해명해보려 했지만 때를 놓쳤다. 안타까운 죽음 앞에 쉽게 말을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기록하려는 마음이 앞선다. 2019년을 떠나보내고 있으니까. 가십이 아닌 작품으로 고인을 기억하고 싶으니까.

글로켄슈필로 시작하는 도입부가 근사했다. 레드벨벳이 〈Ice Cream Cake〉에서 뮤직박스로 선취했던 스산함이 같은 편곡자 Johan Gustafsson를 통해 이어진 듯했다. 그런데 레드벨벳과 달리 〈고블린 (Goblin)〉은 기세를 이어 받아 공격적으로 터뜨리지 않는다. 기껏 쌓은 긴장감은 콕콕 찍는 후렴의 피아노 앞에서 탁 풀린다. 그래서 헷갈렸다. 끝내 물러지는 구성이 너무 안전한가 싶었다.

이 안전함을 설리가 설득한다. 언캐니한 존재, 낯설어서 혐오하게 된 존재의 민낯도 걱정보다 산뜻하다는 듯 노래한다. 그냥 인사하려는 것뿐이라고. 그냥 함께 있고 싶을 뿐이라고. 너를 속이고 물들이겠지만 그게 나쁜 건 아니라고. 1인칭과 2인칭이 섞이는 이 노래는 해리성 장애를 다뤘다지만, 한 사람의 갈등을 한 사회의 갈등으로 읽다 보면 설리가 사회를 설득하고 사랑하려 애쓰는 광경으로도 넓어진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판단이 복잡해진다. 페이크 다큐 형식까지 빌린 영상은 끝과 죽음을 직유로 펼쳐 해석 놀이를 유도한다. 지금은 어떤 해석도 무례할 수 있단 생각이 앞선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케이팝이라는 산업의 무례는 더 어렵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 걸까. 업계는 아티스트의 마음을 창작물로 세련되게 풀어내지만, 그렇게 혼란한 마음까지 상품으로 세공한다. 〈고블린 (Goblin)〉을 레드벨벳의 〈Psycho〉가 이어받는 추모는 “아름답고 슬”프지만, 그것마저 세계관이라는 셀링 포인트로 기능한다. 산업의 영광과 무심한 그림자와 그 안에서 옅게 비치는 선량한 마음들. 이 모두를 밝은 눈으로 계속 볼 수 있을까. 애정을 담아 응원할 수 있을까. 그래도 괜찮을까.


웨이브의 2019 연말결산에 남기려고 썼다. 온전한 추모로 끝맺지 못해 블로그에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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