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산 없이 서른을 맞았다. 3월의 절반이 지났다. 생의 결산은 여태 어려워 노래만 늘어놓는다.
사랑 대신 사람으로 들었다. 사람이 너무 어렵고 귀하고 우리는 그걸 자주 까먹는다. 사람이 구원이고 또한 저주일 때, 나쁜 쪽으로 기울지 않는 귀를 가질 수 있다면.
어릴 땐 슬프거나 아프면 울었는데. 요샌 존엄한 인간을 보면 운다.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정세랑, 2016)들.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면서도 그런 사람들을 생각했다. 엉망인 세계에 구태여 뛰어드는 사람들. 곁에 두기만 해도 닮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들. 되돌려주는 것만으로도 선량해지는 기분. 그것마저 다시 선물하는 사람들.
마키하라 노리유키를 뒤늦게 듣고 있다. 그는 정직한 박자로 많은 음절을 꼭꼭 씹어 부른다. 마음이 놓일 때쯤 코드를 바꿔 꾹 누른다. 말하자면 치트키의 일격. 듣고 나면 뻔하지만 듣는 동안만은 놀랍고 반갑다. 단단하고 확실히 예쁜 가요다.
음의 운동이 이렇다면 틀림없이 말뜻도 예쁘겠지. 번역기를 짚고 속내를 억지로 가늠한다. 그는 겨울을 사랑한다. 소박한 단어를 고른다. 일방향의 진심에 최선을 다한다. 이것만 알아도 한동안은 부족하지 않다.
Alessandro Cortini의 신보를 들으면서 토마토 스튜 같은 삶을 소원했다. 한 번도 끓여본 적 없는, 큰 스테인리스 솥에 뭉근하게 끓이는 토마토 스튜를. 느리게 화성을 밀어가면서 무겁게 진동하고, 쉬이 튀어 오르지 않는 되직한 표면을. 순간의 재치 말고 억겁의 인내도 말고, 적당히 끓으면 곁에 퍼담아 줄 깊이 정도를.
하비누아주, 〈사랑〉.
槇原 敬之, 〈冬がはじまるよ〉.
Alessandro Cortini, 《Volume Massimo》.
정세랑. (2016). 피프티 피플. 파주: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