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색하지 않은 다른 세상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는 치마를 좋아하는 남자아이 ‘꽁치’를 다룬 그림책이다. 책의 첫 장을 넘기면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은 그림책”이란 소개 글이 보인다. 타당한 소개다. 치마를 좋아하는 남자아이는 분명 기대되는 성 역할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충분한 소개는 아니다. 소수자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소개가 으레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설정들을 대부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꽁치의 눈엔 독선적인 아버지, 모성으로 자식을 품는 어머니, 소수자를 외면하는 친구들 따위가 담기지 않는다. 꽁치는 “아빠가 구워준 달걀 프라이를 먹”는다. 꽁치의 성 정체성을 잠깐이나마 고쳐보려 한 건 차라리 엄마였다. 친구들은 있는 그대로의 꽁치를 도와주려 애쓴다. 아마도 꽁치의 세상은 익숙한 성 역할을 가능한 배제하려는 기획을 거쳐 만들어진 듯하다. 그래서 꽁치는 지구 어디에도 없는 세상에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어색하지 않다. “치마 입은 꽁치가 제일 예”쁘다는 말도 어느새 당연해 보인다. 책을 읽어가면서 인물들이 시종일관 보여주는 상냥한 사랑에 점점 익숙해진 덕분이다. 그렇게 이 책은 지금 사는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눈앞에 없는 환상을 받아들일 만하게 그린다는 점에서 이 책은 좋은 그림책이다. 게다가 이 환상은 요정이나 마법 없이도 가능해서, 환상처럼 살 방법까지 생각하게 한다. 환상처럼 살기를 권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좋은 그림책을 초과한다.
2. 아이에게 이 책을 언제쯤 보여줘야 할까
아직 돌잡이도 안 한 내 조카에게 언제쯤 이 책을 보여줄지 고민하고 있다. 답을 내리기엔 모르는 것이 많다. 몇 살부터 이 책의 어휘들을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고, 그 나이의 조카가 사회적 성차를 얼마만큼 배웠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은 조카가 나중에 편견 가득한 사회를 잘 견딜 수 있을지를 모르겠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사회에서 어릴 때부터 남들처럼 키우지 않는 것이 괜찮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당장은 조카가 스스로 책을 읽게 되면 손이 닿는 곳에 책을 놓고 싶다고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유독 어른들 말씀을 시키는 대로 잘 따랐던 이성애자 남자고, 가진 편견들을 고칠 만큼 충분히 공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젠더와 교육 문제엔 특히 자신이 없다. 그나마 좋은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배우고 실천하는 친구들을 곁눈질하며 간신히 지금만큼의 교양을 얻었다. 이 책 역시 그런 우정 덕에 접했다. 꽁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는 아주 행복했다. 이 행복을 더 많은 사람에게 건네고 싶어서 이만큼의 글을 썼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이 책을 아이에게 언제 읽힐지 고민하면 좋겠다. 그 덕에 더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꽁치가 자리한다면, 그 때 세상은 분명 지금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이채 글·기획, 이한솔 그림, 『꽁치의 옷장엔 치마만 100개』, 리젬 그림책,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