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퀴드 레이디의 살랑이는 사랑 노래: 장재인, 《LIQUID》

2010년 슈퍼스타K 2에서 3위를 차지하며 데뷔했다. 11년엔 첫 미니 음반을 냈고 12년엔 소속사를 옮겨 미니 음반을 하나 더 냈다. 13년 말에 미스틱 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겼고 병으로 활동을 쉬다 15년에 《LIQUID》를 냈다. 간간이 참여한 OST를 빼고 나면, 연도를 매겨가며 쓸 수 있는 장재인의 역사는 이 정도다.

이런 역사를 모른 채로 《LIQUID》를 들었지만, 곧 이 음반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친김에 장재인의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슈퍼스타K 시절까지 접하고 음반을 다시 들어봤다. 여전히 훌륭했다. 훌륭하다는 칭찬을 소속사, 음악, 가사로 나누어 길게 늘여 쓴다.

1. 소속사: 미스틱과 장재인의 사이

윤종신이 이끄는 미스틱89는 미스틱 엔터테인먼트로 몸집을 키우는 동안에도 음악적인 신뢰를 지켜왔다. 윤종신을 비롯한 소속 가수와 프로듀서들이 실력을 인정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김예림의 《Simple Mind》에서 처음으로 불만이 새어 나왔다. 섹시 컨셉이 안 어울린다는 지적에서 시작했지만, 이내 소속사가 가수의 개성을 지운다는 우려까지 나왔다(김학선).

그러고 보면 미스틱은 유독 싱어송라이터를 영입하고도 자작곡을 실어주지 않는 편이었다. 박지윤, 퓨어킴에 이어 장재인도 그랬다. 과장을 보태면 좀 더 못된 의심들도 가능하다. ‘자기들도 서툰 자작곡부터 시작해 이 위치까지 왔으면서, 왜 어린 작곡가들의 싹을 키우지 않느냐’는 세대론적 의심, ‘왜 여자 음악가들은 남자 프로듀서의 곡을 부르기만 하느냐’는 여성주의적 의심 따위를 키워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부당한 의심이다. 미스틱에게는 자작곡이라는 자랑보다 경쟁력 있는 곡이 필요했고, 프로듀서 중심으로 소속사의 색깔을 또렷하게 잡을 필요도 있었다. 게다가 장재인은 아직 병 때문에 기타를 오래 연주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런 해명에도 남는 문제는 있다. 그간 미스틱은 젊은 가수들에게 90년대 프로듀서의 고급스러운 음악을 입히는 전략을 취해왔다. 이 젊은 가수들의 위상, 아이돌과 음악가 사이에 애매하게 자리한 이들의 위치를 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들이 90년대 음악을 대신 부르는 수준에 그치지 않으려면, 얼마간의 기획력을 발휘해 자기 음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얼마간’을 확정하고 확보하는 문제가 미스틱의 모든 여가수 앞에 놓여있다.

《LIQUID》는 미스틱과 장재인의 사이를 답으로 제시한다. 윤종신, 정석원, 조정치가 만들었으되, 장재인이 아니면 못 나왔을 곡들을 담았다. 굳이 따지자면 장재인의 전작보단 윤종신의 포크, 특히 조정치와 만난 이후의 포크 음악에 더 가깝기는 하다. 〈그거〉의 첫 부분이 신치림의 〈너랑 왔던〉을 연상시키듯, 듣다 보면 가이드를 불렀을 윤종신의 목소리가 떠오르곤 한다. 그렇지만 이건 분명 장재인의 음악이다. 장재인이 아니었으면 떠올리기 어려웠고, 설령 떠올렸다 해도 이렇게 음반으로 묶어 낼 수는 없었을 곡들이었기 때문이다. 김예림, 박지윤, 퓨어킴의 음반이었다면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장재인은 그간 해왔던 음악과, 제 취향과, 음색으로 자기 음악의 발언권을 얻어냈다. 다음 음반에선 작곡도 맡고 싶다고(티브이데일리 인터뷰), 요즘은 PBR&B에 빠져있다고도 말하지만(텐아시아 인터뷰), 여기서만 해도 장재인은 충분히 제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2. 음악: 끈적이는 리퀴드 포크

프렌치 포크 장르를 시도했다고 한다. 정확한 레퍼런스를 짐작하긴 어렵지만, 아마 세르주 갱스부르와 함께했던 제인 버킨과 그 이후의 전통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을 것이다. 기타 팝이지만 컨트리의 소박한 건강함 대신 내밀한 끈적함을 노렸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이 음반의 노래들은 진성과 가성을 오가는 장재인의 목소리를 받쳐주며 끈적함을 구현하고 있다. 윤종신이 쓴 〈LIQUID〉, 〈그댄 너무 알기 쉬운 남자야〉는 특히 그렇다. 윤종신이 자랑하는 ‘뽕끼’가 끈적한 분위기를 잘 만든다는 걸 김예림의 〈All Right〉이후 다시 발견한다.

《LIQUID》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끈적한 포크를 한 건 아니다. 작년에 발매된 김사월×김해원의 《비밀》만 해도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비밀》이 압도적인 긴장감으로 가득한 ‘지옥’이었다면 《LIQUID》는 그 지옥을 편안하게 포장해 내놓는다. 짝수 번째 곡들이 우울로 치달을 때 홀수 번째 곡들이 분위기의 중심을 돌려놓는 구성 덕분이다. 조규찬의 코러스와 전자 건반 솔로가 지독하게 아득한 4번 트랙 〈그댄 너무 알기 쉬운 남자야〉 다음에 편안한 기타 연주가 담긴 〈밥을 먹어요〉를 배치하는 식으로 말이다. 음반은 기타를 축으로 끈적함과 편안함을 요령 있게 오가고, 장재인은 숨을 더 섞거나 힘을 빼는 식으로 음반의 정서를 잘 조율하고 있다.

3. 가사: 살랑이는 사랑 노래

가사에서도 윤종신의 영향은 느껴진다. 가령 ‘Fake Me’, ‘Forget Me’ 처럼 영어 단어의 어색한 질감을 살린 〈LIQUID〉의 가사는 윤종신이 박지윤의 〈목격자〉를 쓰면서 ‘Touch’를 집요하게 배치했던 걸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가사들은 장재인이 쓴 가사들이다. 그래서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자연히 장재인의 연애들을 상상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하룻밤에 “꿈을 꾼 것 같다”고 말하는 〈밥을 먹어요〉의 그 남자와 〈그댄 알기 쉬운 남자야〉에서 감정을 죄다 드러내는 ‘알기 쉬운 남자’는 같은 사람일 것만 같다. “날 사랑하지 않는 게 이기는 줄” 아는 〈나의 위성〉 속 연애가 〈클라이막스〉를 맞아 〈LIQUID〉의 깨달음을 줬을 것도 같다. 어쩌면 음반 전체가 한 연애에서 나온 건 아닐까? 이렇게 이 음반의 가사들은 부른 사람을 제멋대로 상상하게 한다. 음반 단위의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한다.

투병과 이별 때문일까. 가사는 사랑의 상처를 두려워한다. “어차피 흐르다가 고였다 또 흘러내려 사라”질 거라고 단언하고, 그러니 “이 사랑에 우리를 잃지 말”자고 제안한다. 내 의지를 초과하는 사랑의 과정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의 달콤함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일단 밥을 먹어요”라고 말할 줄 알고, 키스 직전의 시간을 “더 황홀”하게 여길 줄도 안다. 어떻게 흘러도 좋다고 말하는 리퀴드 레이디는 그래서 다가오는 사랑을 구태여 마다하지도 않는다. 사랑의 기쁨을 가능한 가볍게 받아들이려 한다. 이 음반에는 사랑에 관한 딱 이만큼의 성찰이 담겨 있다. 이제는 다음이 궁금하다. 이별에 넘어져 사랑을 의심했지만 차마 사랑을 버리지도 못한 이 사람의 다음 연애는 어땠을까? 이렇게 이 음반은 저마다의 사랑을 다시 보게 하고, 다음 사랑 이야기를 기다리게 한다. 좋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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