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결인 채로 미움인 노래를

미운 사람이 많다. 싫은 것과는 좀 다른 기분인데, 따지자면 윤리적 판단의 함량이 더 적은 미적 판단이다. 대신 애증, 연민, 질투 따위의 건강하지 않은 마음이 섞여 있어서 덜 명료하고 더 사적이다. 이런 미운 사람들이 싫은 사람만큼이나 도처에 있으니 문제다. 예컨대 일베 유저는 싫고 깨어있는 시민들은 밉다. 콘돔 안 쓰는 게 자랑인 놈들이 싫다면 성 구매자들은 밉다. 

아니다. 잘 모르겠다. 싫던 게 밉고 밉던 게 싫은가 하면 나였던 것이 밉다가 싫어지다가 한다. 한때 나는 깨어있는 시민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그들은 밉다에서 싫다로 넘어갈 기세고 끔찍한 일이었던 성 구매는 남이 한다면 별수 있겠나 싶어진다. 변덕 속에서 유일한 기준은 지금 이 순간의 나일 것이다. 내 세계의 한 고비가 넘어갈 때 미운 것들은 내 품으로 들어오거나 싫은 것들의 진창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밉다는 건 그러므로 결정되지 못한 찝찝함이다. 내가 지금 사는 세계에선 어찌할 수 없이 판단 유보된 것들만이 밉다는 말 안에 자리한다. 
그러고 보면 진정으로 미운 건 내 안의 누군가다. 에밀 시오랑을 읽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과 허무만을 생각하는 사람, 글로 만든 비장한 사춘기의 형상을 더는 지지하지 않는다. 엄마도 아빠도 나도 결국엔 다 죽어버릴 거란 예감에 잠을 설치던 열한 살의 허무가 별로 아름답지 않았던 것처럼. 책으로 혁명을 한다던 사사키 아타루를 읽을 때도 그랬다. 글을 자꾸 써내면 근사한 사건이 벌어질 줄 알았던 스물한 살만큼 미웠다. 기준은 지금 이 순간의 나다. 그들이 밉다는 건 내 세계의 어딘가엔 여전히 열한 살과 스물한 살의 조각이 박혀있다는 뜻이다. 

미움을 읽는 것과 듣는 것이 다르다. 이상한 일이다. 비슷한 정도로 내가 좋아하고 비슷한 정도로 돈이 안 되는 것들인데도 말이다. 글이었다면 미웠을 사람이 노래여서 가여워서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이소라의 가사가 늘 그렇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의 전화 통화가 정말이었다면, 연애 상담을 해달랍시고 새벽에 전화를 걸어서 얘는 날 사랑하지 않지만 그래도 난 더 잘해줄 거라고 말하는 등신 호구가 있다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 연애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쏘아붙이는 것이 윤리적인 우정이다. <믿음>과 <제발>에서의 구걸은 또 어떤가. 나는 이 등신 호구들이 밉고 방점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에 찍힌다. 내가 해봤고 내가 여전히 그런 종류의 사람이어서 밉다는 뜻이다. 이소라는 언제나 그 미운 나들을 그러모아 한참이나 밉고 슬프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짓는다. 

이소라의 8집에 대한 말들은 발라드 또는 모던 록을 하던 가수의 헤비한 록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를 따진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것들이 남아있다. 다른 록 음반이 아닌 이걸 집어들을 이유는 그들에게서 비롯한다. 그동안 함께해온 작곡가들의 곡이기에 멜로디와 화성은 발라드로 고쳐 불러도 어색하지 않고 가사 속 밉고 슬픈 화자들은 여전하다. 임헌일이 곡을 쓰고 이소라가 말을 붙인 <나 Focus>는 특히 그렇다. 여기에는 나와 너만을 주어로 끊임없이 글을 쓰던 내가, 너에게 맞춰 영혼을 성형하고 애원하던 내가 있다. 나에 대해 다짐하면서도 Focus는 온통 너의 애정에만 쏠려있는, 자존감이 낮아 미운 내가 슬프고 아름답게 노래한다. 도리 없이 많이 좋아한다, 그리하여.  

이소라, <나 Focus>, 《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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