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하고 소리 내어 읽으면 그건 그저 Gwangju, 하는 소리에 그치는 게 아니듯 내게 광주는 서울이나 대전처럼 지명 중 하나로 그칠 수 없다. 내게 광주는 어떻게든 정치적인 공간이다. 광주에 관해 처음 읽은 책이 군대에서 몰래 읽었던 『오월의 사회과학』이었고 단 한 번 갔던 광주 여행의 유일한 방문지는 망월동 묘역이었다. 망월동의 신묘역에서 잘 짜인 서사에 눈물 짓다 설명도 장식도 없는 구묘역에 이르러 느낀 황량한 기분을 잊지 못한다. 도대체 아는 것이 없었다. 부산 토박이인 내게 광주는 내가 짓지 않은 죄책감이고 신묘역의 슬픔과 구묘역의 황량함 사이 무언가다.
그러니 「같은 시간 강릉 광주」라는 한겨레 신문의 사진 기사 제목을 보면 자연히 정치적인 대조를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릉을 두고는 무장공비를 빼면 마땅한 정치적인 그림을 상상할 수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렇게 클릭한 사진 기사에는 벚꽃이 핀 화사한 광주 전남대의 교정과 아직 폭설이 그치지 않은 강릉 오죽헌의 날씨가 담겨있다. 김이 빠졌다. 광주에 대한 비정치적 말하기를 상상해본 일이 없었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Eric’s Song〉을 들을 때의 일이다. 마지막까지 말하지 않다 끝에야 기어이 뱉고 마는 ‘Put the 광주 inside your world’. 그녀가 담아가라고 말한 광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빛고을의 유려한 경관인지 광주를 피로 빛낸 사람들의 위대한 이야기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일로 여행객들이 쉬어 갈 광주역 앞 히딩크 모텔인지 도무지 알지를 못한다. 그러나 광주는 언제나 정치적 은유였으므로 나는 끊임없이 정치적 사건으로 이 가사를 이해하려했고 독해는 번번이 미끄러졌다. 기타와 함께 노랫말은 바람처럼 흐른다. 하지만 너는 우주라고. 바람을 따라 흐르면 된다고. 그리고 너의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라고.
그것이 광주라는 단어를 포함한 글을 접하는 가장 적실한 독법인 한에서 나는 이 방법을 선입견이라는 이름으로 폐기하지 못한다. 여전히 많은 경우 광주는 정치다. 그 오월의 일들을 빛나는 인간성으로 부르자는 합의도 얻지 못한 비극의 공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발견하지 못한, 어쩌면 내가 죽기 전까지도 알 길이 없는 다른 빛들이 광주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니 어쩌면 에릭의 광주는 비극의 공간이 아니었으리란 추측을 하게 된다. 화사하게 봄꽃이 핀 오늘 아침 광주일 거란 생각을 한다. 봄꽃 아래 화사하게 웃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오늘 아침 새로 쓰는 우정의 공간일 것이란 상상을 한다. 비극을 잊지 않고 품에 안은 사람들이 발산하는 푸르른 기운일 거란 믿음을 갖게 된다. 빛이며 죽음이며 정치이며 우정인 어떤 푸르름.
내 삶의 궤적은 고향 부산과 제2의 고향 서울을 잇는 직선을 따라 경부선으로 그려질 것이고 내가 광주라는 꼭짓점에 닿을 일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영원히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도 위 영영 만들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삼각형, 아마도 넘어가지 않을 책의 한 장, 그러나 나 한 사람의 존재 따위에는 무심하게 해가 뜨고 질 광주 이야기를 듣는다. 광주를 너의 세계 속에 넣어 가라고. 세계 안에 담아도 네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 광주를 넣어 가라고. 사뿐한 우정으로 이 곳을 바라보라고.
최고은, 〈Eric’s Song〉, 《36.5》,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