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형의 세계, 혹은 새하얀 다림질의 냄새

아무것도 쓸어내지 않는 바람이 분다. 작고 낮게. 모서리가 삼각형으로 구겨진 한 장 한 장이 사뿐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달라붙지 않는 단어들의 고요. 하늘과 바다 사이에, 선이 없는 하늘색의 삼차원에 갈색 연기가 발목부터 새어든다.

*

음반을 산 건 그 때가 두 번째였다. 취향은 사춘기에나 얼핏 생겼으니 그보다 어릴 땐 둘이나 되는 누나들을 따라하기 바빴다. 작은 누나가 큰 누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걸 보고 나도 큰 누나를 언니라고 불렀던 아주 어린 날처럼. 누나들 따라 무턱대고 좋아했던 H.O.T랑 신화를 빼면 스스로 해본 첫 팬질의 대상은 클래지콰이였다. 그러니 클래지콰이 2집 다음으로 사고 싶은 음반이 롤러코스터 5집인 건 딴에는 족보 있는 취향이었다. 얼마 전까진 게임기 사달라고 징징대던 아들이 갑자기 음반을 돈 주고 사달라니 엄마도 황당했겠지만 그러든 말든 줄기차게 졸랐다. 컴퓨터 스피커로 며칠을 <숨길 수 없어요> 뮤비만 틀었다. 하도 틀어서 거실에 노래가 달라붙을 지경이 된 어느 저녁, 큰 누나가 하늘색 디스크가 담긴 갈색 음반을 던져놓고 갔다.  

세 사람이 만든 밴드의 다섯 번째 음반이다. 이 음반 전의 밴드는 애시드 재즈, 시부야케이 따위의 세련된 것들을 잘 짬뽕시켜 좋은 팝송을 만들어왔다. 이 팀을 설명하는 말은 그래서 바깥에서 들여온 장르명과 내부에서 꾸린 팝의 토대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음반에는 그런 장르명들이 좀체 달라붙질 않는다. 대신 이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 사람이 있다. 바깥에서 새 소리를 찾던 사람들이 안으로 몸을 돌려 자기가 가진 것들을 주섬주섬 꺼내놓는다. 서로를 향하되 어느 한 명도 앞으로 나서지 않아 넓고 느슨하게 만들어진 트라이앵글. 그리하여 누구의 영향을 언급하지 않아도 괜찮은, 온전히 자신들인 세계. 이 음반을 끝으로 아직까지 새 음반 소식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인트로와 인터미션, 셋째 곡인 <눈을 한 번 깜박>이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짜놓은 차분하고 쓸쓸한 기운이 음반 전체의 채도를 낮춘다. <숨길 수 없어요>나 <두 사람>의 터뜨리는 후렴도, <괜찮아요>의 기교적인 재미도, <님의 노래>에 살짝 비치는 장르적인 흔적도 툭 튀어나와 발에 채이는 대신 오돌토돌한 질감에 머문다. 음반을 내고 얼마 안 있어 디지털 싱글로 낸 <유행가>를 싣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유행가>를 백번 쯤 돌려 들을 때는 괜히 억울했다. 어쩜 이런 걸 만들어놓고 싣지 않을 수가 있는 거지? 그땐 뭐든 좋은 거라면 다 손에 쥐고 싶었는데. 그들의 선택이 맞았단 걸 지금은 안다. 아무리 좋아도 빼야 할 건 빼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완결성이 이 음반 안에는 있다. 이건 그 순간의 최고나 최선을 한데 뭉친 의지의 결과물이 아니다. 차분하고 조신스럽게 균형을 잡아 사람들을 슬쩍 어디론가 데려왔다 돌려보내는 섬 같은 음반이다.  

섬의 음반. 이 무균질의 하늘색 삼차원은 섬처럼 독립된 세계가 되어 사람들을 묶어둔다. 괜히 기분이 나쁜데 그걸 말로 풀어 설명할 길이 없거나 설명할수록 구차해질 때 나는 이 음반을 틀었다. 차분하지만 시종일관 조용하기만 한 음반은 또 아니어서 여러 감정들을 가만가만 따라가고 나면 기분이 나빴단 걸 까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위안 받고 훌훌 일어났다. 오디오에 시디를 걸어놓고 혼자 누워있던 안방의 풍경을 기억한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의 어둑함과 이불의 온도와 벽지의 냄새를.

가끔은 혼자가 아니었다. 갈색의 안방에 하늘색을 불어넣는 엄마가 있었다. 내가 어렸던만큼 젊었던 나의 어머니는 <님의 노래>가 들리는 방에서 다림질을 했다. 나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엄마는 아마도 아버지의 와이셔츠를 다리고 있었던가. 세탁된 하얀 면을 뜨거운 쇠가 밀어나가는 냄새. 엄마는 여왕 말고 왕비가 되고 싶다고 했다. 소망에서조차 주인공이 아닌 당신의 꿈을 나는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한 쪽 다리를 세우고 앉아 셔츠를 다리는 그날의 왕비는 그렇게 새하얀 냄새로 남아있다. ‘아무도 모’르는 ‘그 타는 속을’ 삭이고 다려가면서. 언제고 나를 기다려줄 것처럼. ‘괜찮’다고, 축축하고 주름진 것들을 조용히 다리고 말려줄 것처럼.

이 트라이앵글은 온통 두 사람의 이야기다. 매일 뭐가 그리 웃을 일이 많았는지 모르던 우리 둘(눈을 한번 깜빡)의 이야기이며 당신과 나만의 비밀(숨길 수 없어요)이며 끝나지 않는 음악 속의 두 사람(두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밴드와 듣는 사람들은 바깥의 다른 점에 함께 매달려있다. 세 번째 점에 서서 두 사람을 본다. 어린 나와 나의 어머니를. 나와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나와 나의 연인을. 영원할 수 없는 것들의 시간이 잠깐 멈춘다. 외롭지 않은 삼각형의 세계로. 그리하여 찰나일 영원으로. 

롤러 코스터(Roller Coaster), <숨길 수 없어요>, 《Triangle》,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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