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적인 형편
말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했다. 던지고자 하는 말이 이토록 분명한 기획을 받았다면 어떤 말이든 되돌려 던질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떠밀리듯 글을 쓰기로 했고 그렇게 2주가 지났다. 좋아하면서도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는 기분이 있어 말을 더듬었다. 그 기분을 정확히 포착하는 일에는 끝내 실패하겠지만 더 늦기 전에 되는대로 옮겨 적는다.
이번에도 가인은 딱 하나의 주제만 밀어붙이고 있다. 그렇게 하자니 싱글은 너무 짧고 정규 음반은 호흡이 너무 길다. 가인의 프로듀싱 팀이 네 번이나 미니 음반을 고집한 이유도 아마 이러할 것이다. 음반 전체의 정서가 딱 하나이기 때문에 사적인 삶의 역사와도 더 잘 엮여왔다. 내게 2010년의 《Step 2/4》는 수능을 앞둔 재수생의 불안이었고 2012년의 《Talk About S.》는 입대를 앞둔 첫 연애의 불안이었다. 지금도 개인사의 분기를 설명해도 좋을 정도로 또렷한 음반들이었다고 판단한다.
2. 종교라는 문제: 반항은 세트메뉴로
주제가 하나라고 했으니 개별 곡의 가사보다는 큰 이야기에 집중할 생각이다. 예컨대 나는 〈Free Will〉에서 말하는 근대적인 자유의지 개념을 거부한다. “모든 건 네 선택의 정직하고 또 정확한 결과”라는 주장은 뻥이라고 본다. 언제 우리네 삶이 그런 적이 있었나. 성차별의 역사를 가린 채 ‘법적으로 평등하게 자유롭다’고만 해서는 여성의 권리를 충분히 옹호하기 어렵다. 그런데 두 곡을 더 지나 〈두 여자〉에 이르면 무의식이나 분열증에 사로잡힌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있다. 〈Free Will〉의 자유인과는 분명 다른 인간 이해다. 이렇게 개별 가사에 대한 불만도 있고 가사들끼리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지점들을 이유로 음반의 기획을 낮추어 평가하진 않을 것이다. 가사 자체의 뜻보단 그것들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전략적 소용을 위해 쓰이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Free Will〉은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은 여성을 말하려고, 〈두 여자〉는 여성적 매력의 여러 면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런 큰 그림을 염두에 둔 한에서는 저 두 곡 또한 긍정할 수 있다.
〈피어나〉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인이 노려온 여성상은 분명하다. 가인은 결코 남자들의 성적 환상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의 환상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 쾌락을 선점하고 남자보다도 더 강렬하게 즐긴다. 그래서 ‘센 언니’가 되지 않았음에도 남자들을 멋적게 만든다. 이 전략은 이번 음반에서 더 전투적으로 구사된다. 이 음반이 남성 랩퍼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특히 그렇다. 음반 속에서 가인은 흔히 여성을 대상화하기 일쑤인 남성 랩퍼들을 데려와 오히려 먼저 유혹하고 먼저 대상화한다.〈Apple〉에서 먼저 유혹하고 〈Free Will〉에서 자신과 같은 선택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매드 클라운이 가사를 쓴 끝 곡 〈Guilty〉로 남성을 대하는 이 음반의 태도를 요약한다. “나빴어 첨부터 넌 알고 있었어” 다음에 “웃겨 니가 훤히 보여”를 붙이면서, 남자들의 수법에 맞서 먼저 알고 웃어버리는 방식으로.
전작을 답습한 수준을 넘어설 돌파구는 종교적 색채였고 이점이 이 음반을 각별하게 만든다. 여성의 쾌락만큼이나 종교를 패러디하는 일도 금기였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겐 종교 자체에 반대할 깡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IS도 까고 개독도 까고 땡중도 까지만 교양 있는 민주 시민으로서 차마 신앙의 자유 그 자체를 까진 못한다. “신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순 없지만 신이 없다는 것도 증명할 순 없잖아요?”라는 말 앞에선 자연과학자도 입을 다무는 편이 현명하다. 그런데도 이 음반은 반항을 감행한다. ‘컨셉인데 왜 훈장질이냐?’라는 보호막을 쓴 채로 종교 자체를 비튼다. 그저 컨셉으로 넘기기엔 꽤 진지한 종교 비판으로 읽히는 대목도 있다. 〈Paradise Lost〉 속 “They’re making up a story so that they can control you and me(그들은 너와 나를 지배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든다).” 부분이 그 예다. 그래서일까? 이 가사는 엠넷에선 나오지만 공중파에선 안 나온다.
신은 오직 하나인데 복수형 ‘They’는 누구일까. 종교를 구성하는 종교계이거나 여성이 차별 받는 사회의 기득권이거나 둘 다일 것이다. 비약을 무릅쓰고 ‘둘 다’였을 거란 해석의 편에 서기로 했다. 금기들은 중첩되기 때문이다. 금기들은 인종, 성별, 종교, 정치 등에서 따로 작동하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서 사회를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항 역시 세트메뉴로 저질러야 한다. 가령 여성 문제엔 관심이 있지만 여성 사제 문제엔 무관심한 사람이 여성 문제를 일관성 있게 다룰 수는 없다. 종교 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진보를 자처하면서도 가정에선 가부장이고 싶은 사람의 시위는 아마 정치적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여성의 현실적 종속을 쏙 빼놓고는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온전히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 여성을 위한다면 종교도 버리고 보수적 세계관도 버리라는 주장은 아니다. 끝장을 보지 못할 거면 반항할 생각도 말라는 엄포도 아니다. 금기들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반항에는 성역에 없어야 한다는 원칙을 품고 하나씩 해보자는 것이다. 이 음반에는 그런 반항의 세트메뉴가 얼핏 보인다. 별 생각 없이 고른 컨셉이었다고 해도, 이 음반은 반항을 깊게 고민한 사람만이 우연하게 닿을 수 있는 지점을 적절히 건드리고 있다.
3. 줄타기의 문제: 반항은 반 발짝 너머로
기대만큼 매끈한 가요 음반이다. 〈Apple〉엔 잊기 힘든 달콤함이 있고 〈Paradise Lost〉엔 파이프 오르간이 조형한 웅장함이 있다. 〈Free Will〉과 〈The First Temptation〉에선 East4A의 편곡이 돋보이고 〈Guilty〉는 Darkside의 몇몇 곡이 떠오를 정도로 말끔하다.
그러나 말끔함이 기대한 전부는 아니었다. 그보단 말끔함을 비집고 튀어 나오는 의외와 극단을 더 기대했다. 아쉽게도 〈Paradise Lost〉에 의외와 극단은 없다. 특정 음역대나 소리가 모나는 법이 없고 소리를 터뜨려 감정을 고조시킬 장치도 없다. 클라이맥스는 오히려 황수아 감독이 맡은 뮤직 비디오의 번쩍거리는 화면에 있다. 소리를 과장하지 않는 이민수 작곡가의 작법일 수도 있겠지만 은근한 고혹을 의도했던 〈돌이킬 수 없는〉보다도 덜하단 인상을 준다. 물론 극적인 구성만이 답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소리로 압도적인 긴장감을 품었던 전작의 〈폭로〉에 비할 곡도 이 음반엔 없다. 〈The First Temptation〉이 거기에 근접하지만 바로 뒤에 붙은 발라드 곡〈두 여자〉의 이질감이 감흥을 방해한다. 분명 잘 만든 곡들인데도 성큼성큼 앞지르는 대신 반 발짝만 나와 타협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이 반 발짝이야말로 존중해 마땅한 미덕이다. 대중예술 종사자라면 무릇 이 낯설음과 익숙함 사이, 예술성과 대중성의 중간을 겨냥해야 한다. 예술인이기에 앞서 예술로 돈을 버는 생활인이라면 돈을 쥐어줄 대중의 눈치를 살펴 마땅하다. 게다가 이 음반은 그런 대중음악 중에서도 앞으로 발을 많이 뻗은 편이다. 주제 상의 방점이 찍힌 〈Paradise Lost〉보다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Apple〉의 음원 순위가 더 높고, 무대의 서사는 제쳐두고 일단 다리를 벌리는 동작이 야하고 싸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전위적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그래도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면 이런 것이다. 반 발짝을 여러 방향으로 여러번 내딛다보면 그 발자국들은 미세하게 앞서거나 뒷설 것이다. 그렇게 우연히 약간 앞선 발자국이 우리를 매혹할지도 모른다. 뜬구름 같은 낙관이지만 근거가 없지는 않다. 한 번도 아이돌 음악을 만든 적 없던 Hitchhiker와 협업한 〈Abracadabra〉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인, 조영철, 이민수, 김이나를 포함한 이 팀이 그간 반 발짝 너머를 납득시킬 역량을 증명해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인이 그리는 여성은 여전히 각별하기 때문이다. 여성 문제에 관한 한 언제나 미끄러져 온 남자들의 말을 넘어설 힘이 있기 때문이다. 2015년에 가장 기대하는 팝이 가인이었듯 다음 해에도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