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이 모자란다.
주말은 추웠다. 난방 돌리는 것도 잊고 드라마만 보다가 감기에 걸렸다. 소문대로 《펀치》는 재밌었다. 빠른 판단으로 전선을 바꿔 그리면서 싸우는 인물들을 보면 기분 좋은 울렁거림을 느꼈다. 가난한 가족과 당위 사이에서 갈등할 때 나는 기껏 에버노트 앱을 켜는데 드라마에선 일생을 건 도박을 벌였다. 한 편이 끝나면 불 꺼진 자취방은 환기가 덜 된 공기처럼 한심해졌다. 술이었다면 숙취 때문에 멈췄을 텐데, 향초에 불을 붙이고 다음 편과 그다음 편을 이어 재생했다. 향초는 공기를 맑게 한다기보단 산소를 줄여나갔다. “시간이 모자란다”는 대사를 생각했다. 드라마를 멈췄는데 뭘 해야 할지 몰라 옛날에 쓴 글들을 읽었다.
시간은 늘 모자란다. 글 만지는 사람 치고 효율 좇는 사람 드물지만, 그런 그들의 시간 또한 모자란다. 가능한 좋은 걸 읽고 써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2년도 더 전에 내가 쓴 잡지의 글을 다시 읽었다. 군더더기도 많고 논점도 모자랐다. 그래도 부러웠다. 제 능력을 초과하는 것들을 이해하고 쓰려고 분투하는 내가 있었다. 똑똑한 사람들의 칭찬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읽고 쓸 이유가 있었다. 이제는 마감이 없다. 쓰지 않아도 좋고,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초라하게 살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보다도 초라한 지금을 그렇게 변명한다.
2. 그런데 그대는 도대체 왜 쓰는가?
자기 서사를 포기하지 않았던 잡지는 출간을 멈췄다. 블로그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음악에 관해서는 “비평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쓰고, 과제물로 내는 글도 “내 삶을 구하기 위해서” 쓴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쓰는가? 속되게 옮긴다. 나는 왜 일기장을 놔두고 블로그에 쓰는가? 달리 옮긴다. 내 이야기는 이름도 모를 타인에게 무슨 소용인가?
일기를 쓰면 내 안의 진짜 나를 이해할 수 있다지만 그렇지도 않다. “자기 자신을 일관성 있는 주체로 꾸미는 자기 서사의 함정”이 언제고 작동하기 때문이다. 저건 『방법서설』 서평에서 썼던 표현인데, 그땐 데카르트가 이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고 썼지만 사실 뻥이다. 세계를 사진처럼 글로 베낄 재주는 평등하게 결여되어 있다. 자기 서사는 나도 너도 아닌 사람, 어디에도 없는 사람의 서사다. 차라리 소설가의 재능이 필요한 곳에 무능한 나는 왜 있을까.
그런데 그대는 도대체 왜 쓰는가? ─ A: 나는 잉크에 적신 펜을 손에 들고 생각하는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 더구나 잉크병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종이를 응시하면서 자신을 정열에 내맡기는 사람에는 더더욱 속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쓰는 일에 화가 나거나 수치를 느낀다. 쓴다는 것은 내게 용변을 보는 것처럼 피치 못할 일이다. 비유적으로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내게는 역겹다. B: 그렇다면 그대는 도대체 왜 쓰는가? A: 친애하는 이여, 그대를 믿고 말하건대 지금까지 내 생각을 털어버릴 다른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B: 그렇다면 왜 생각을 털어버리고 싶어 하는가? A: 왜 그러고 싶어 하느냐고? 내가 그러고 싶어 한다고? 나는 그렇게 해야 할 뿐이다. B: 알았네! 알았어! (F. Nietzsche)
저 위대한 플라톤, 루소, 단테의 자서전도 결국 뻥일 것이니 믿지 않겠다던 사람이 쓴 글이다. 글의 아름다움, 읽고 쓰기만 해도 도래할 혁명을 믿는 사람의 반대편에 선 사람의 글이다. 정작 자신은 마찬가지로 뻥일 글을 왜 쓰는지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해야 할 뿐이다. 능동적인 의지와 무관하게 뱉어진 흔적, 저자 아닌 가상 인물의 입을 빌려 쏟아진 뻥의 효용에 대해선 무심하다. 효용은 읽는 사람의 몫, 아니면 차라리 나무를 잘라 그 글을 찍어내고 뿌릴 사람의 고민거리다. 내 글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3. 근황
부진한 삶을 살았다. 착상의 조각들은 만들었지만, 내 삶을 던져도 좋은 퍼즐은 완성하지 못했다. 견딜 수 없을 때 능력껏 되는대로 뱉어내라는 주문 앞에 딱 이것만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