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상
겹쳐지지 않는 일상이 둘 있다. 그것이 일상인 한 이해해야 하므로 글을 쓴다.
2년 전이다. 입대하기 딱 7일 전에 활동하던 자치언론의 폐간호를 발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입대 전엔 잡지 말고 다른 일에 매진해야 했다. 이를테면 애인을 붙들어 맬 구애를 해야 했고 한동안은 못할 죽음에 가까운 음주들을 해야 했다. 2년 전의 내겐 좋은 글이 더 중요했다. 학교 안에서 일을 벌였고 거기에 실천이란 이름을 붙여주는 글쓰기를 했다. 글만이 목표는 아니었다. 실천한 만큼 글을 쓸 수 있고, 쓰는 만큼 제 삶에 의미를 매겨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지금의 일상은 아니므로 이걸 이해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일상이 가능한 학생사회는 이제 종언을 고했다. 이제와 실천이라니. 학교에서 실천을 말하던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지 오래다. 사람이 없으면 사회도 없다. 사회가 없는 것보다 내겐 당장 잡지에 새 사람이 안 온다는 게 중요했다. 잡지는 문을 닫았다. 제대하고 돌아온 학교는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았다. 아크로폴리스는 학생들이 아닌 포크레인 소리로만 시끄러웠다. 이제 나는 유령처럼 학교를 배회하며 학점 채우고 스펙도 쌓아 밥 벌어먹을 궁리만 하면 된다 싶었다. 정치가 답답해지면 광화문 한 번 나가거나 술이나 마시면서 세계가 왜 이 모양인지 탓하면 그만이다. 2014년 대학에서의 일상은 이렇게 간단하다.
그 좋은 술을 운동권과 그 언저리가 주로 모이는 녹두호프에서 마시는 게 문제일까. 다른 일상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 있었다. 교육학과 친구들은 2011년 서울대 본부 점거가 참가자의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에 관한 논문을 쓴다며 인터뷰를 청했다. 같은 반 후배는 얼굴도 몰랐을 내게 반 회칙을 제정하는 총회를 열겠다며 도움을 구했다. 성균관대학교의 친구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5일 간의 동조 단식을 했다. 술집 주인 이모의 환갑잔치에서 사람들은 작자 미상의 민중가요 〈불나비〉를 제창했다. 나는 그걸 촬영했고 종종 틀어본다.
사태는 분명하다. 안 되는 판이고, 거기서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서 도망치면 그만인데 그럴 수 없는 마음을 정리하려 글을 쓴다. 내 삶을 구하기 위해서다.
2. 늙음
늙음에 대해 쓴다. 죽지 못한 늙음. 꼭 학생사회가 그렇다. 만약 학생사회가 그저 학생과 사회의 뜻을 이어붙인 단어였다면 이 단어가 늙었을 리 없다. 이 말은 학생운동의 맥락에서 생긴 역사적인 단어이며 학내 실천의 토대를 부르는 정치적인 단어인 까닭에 일찍 늙어버렸다. 아마 이 단어가 처음 태어났을 땐 학생회 구조 아래 모든 사람들이 곧 학생사회고 학내 실천은 곧 학생운동이었을 것이다. 물론 학생운동이 잘 될 땐 이런 말조차 만들 필요 없이 ‘학우 여러분!’하면 그만이었겠지만, 적어도 이 단어가 태어날 때만 해도 이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람은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기껏해야 4년 남짓 학교를 다닌다. 지금의 학생들은 저 말보다 어리다. 그들의 대부분은 학생회나 학생운동을 모르고, 겁내거나 경멸한다. 나 역시 늙은 단어를 붙들고 일찍 늙긴 싫어서 새로운 단어를 발명하거나 침묵하자고 다짐했다.
외연이 더 넓은 단어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의 학생사회는 사회보다 훨씬 작은 것, 차라리 소규모 공동체에 가까웠다. 더 큰 사회를 그려야했다. 그래서 반(反) 운동권 정서를 보이는 온라인 여론을 통계 처리로 가시화해 기존 학생사회에 붙여보려 했다. 학교 중앙전산실에서 통계 프로그램과 형태소 분석기를 돌리며 수없이 밤을 새웠다. 실천이란 말도 달라져야 했다. 더는 실천이 학생운동, 노동운동만을 지시하지 않아서다. 어려운 사회철학적 논의는 역량을 넘는 일이어서 일단 ‘공적 이성을 발휘하여 사회를 좀 더 나은 것으로 바꾸는 행위’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래서 잡지엔 경영, 경제 동아리의 사회적 공헌을 취재한 기사도 실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다 잘 안 됐다. 하나로 묶이질 않았다. 온라인 여론은 온라인에 그쳤고 경영, 경제 동아리들에겐 굳이 스스로를 운동권 조직과 나란히 놓을 이유가 없었다. 대학에서의 실천이라는 주제 자체가 매력적이지 않으니 그것에 속할 이유도 맞설 이유도 없었다.
어림은 늙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늙음은 어림을 제압하지 못한다. 순리대로 학생들은 떠나갔고 학생사회는 더 늙었다. 슬픈 일은 아니다. 사회의 꿈이 끝나도 모임들은 남는다.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누구는 록 밴드를 하고 누구는 책 읽기 모임을, 또 누구는 여행 동아리를 하면 된다. 대학생은 어찌해도 한가한 존재들이어서 함께 할 사람을 찾기도 쉽다. 운동권을 해도 괜찮다. 대학은 이제 전체 집합은 상상할 수 없는 작은 모임들의 집합이 되었다.
3. 의심
제대하고 나선 착실히 살기로 했다. 집회, 자보, 잡지 같은 걸로 밤을 새우거나 수업을 빠지면서 낭비하려고 낸 등록금이 아니었다. 수업도 빠짐없이 듣고 교수님들 계실 과 행사에도 열심히 나갔다. 날씨는 적당히 맑았고 사람들의 얼굴도 그래보였다. 학생들이 모이던 해방터를 막고 오래 공사한 끝에 세운 건물이 ‘두산’ 인문관인 것이 그렇게 싫었는데, 이젠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그 건물에서 두 개의 수업을 듣는다.
두산 인문관 지하 강의실에서 사회철학 교양 수업을 듣고 있었다. 듣거나 졸고 있었다. 선생님의 강의 사이로 ‘밀양에서 싸우는 할머니들’이란 단어가 들렸다. 잠이 확 깨면서 이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때가 생각났다. 잡지의 창간호를 만든 사람 중 한 명의 결혼식에 축가를 부르러 갔을 때였다. 부부가 입장할 때 〈결혼 행진곡〉 대신 〈인터내셔널가〉가 흘러나오는 특별한 결혼식이었다. 주례를 본 선생님은 ‘안녕들하십니까’ 현상과 전쟁을 언급했고 사회자는 철도 파업을 이유로 침탈당한 민주노총 소식을 전했다. 내가 본 가장 근사한 결혼식이었다. 그때 주례를 봤던 선생님은 수업에서도 지나가는 말처럼 아주 잠깐, 밀양을 말했다.
여전히 대학에서의 실천을 말하는 사람들, 자치의 경험과 실천의 꿈을 타인에게 증여하려는 사람들의 기대도 아마 이런 것이겠다. 대학에서의 교육은 강의에만 박제될 수 없다는 주장은 곧 밀양 같은 현장을 잊지 말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해하지만 의심도 생긴다. 이게 단지 과거의 대학생들, 해외의 68세대나 한국의 80년대가 그랬으니 지금도 그래야한다는 억지라면? 어디까지나 대학은 학문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곳이다. 누군가는 실천과 연결된 교육을 원하지만 요즘 기업에선 당장 현장에 투입할 기업형 인재 육성을 요구한다. 요구를 다 들어줄 순 없다. 기업에게 ‘그런 건 기업이 직접 투자해서 교육하라’고 말하려면 실천 역시 같은 비판에 맞서야 한다. 88만원 세대인 대학생에게 지식인으로서의 앙가주망을 강요할 시대가 아니므로.
수업 속에서 잠깐 스친 밀양이란 발음을 믿는다. 교육의 대상은 이론과 동시에 실천일 수 있다. 이론이 지시하는 정의를 위해 현실에 개입하는 양심을 요구할 수 있다. 물론 충분한 대답은 아니다. 학교에게 굳이 실천까지 교육하고 장려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이것으로 충분하다. 대학과 실천 사이의 연관만 해도 학내 실천을 탄압하는 이들에게 항의할 논거가 된다. 내게도 도움이 된다. 나 자신을 실천으로 던지라는 명령까진 못되지만 당장 고생하는 내 친구들을 응원할 계기 정도는 된다.
미학과 개강 파티에 갔다. 과 친구들도 사귀고 교수님들께 얼굴 도장도 좀 찍으려는 생각이었다. 듣고 있는 수업을 강의하시는 선생님도 오셨다. 2차를 넘기고 모두 제법 술에 취해 혀가 꼬이기 시작할 무렵 선생님께서 갑자기 물었다. “근데 너희 중에도 몇 년 전에 서울대 본부 점거 하고 그랬던 사람 있나?” 선생님의 정치적 성향을 짐작하고 나서 처신해야 하지만 취기를 빌어 덜컥 그랬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래! 학생들이 그런 것도 좀 하고 그래야지!”하는 말을 들었다. 고마웠다. 그런데 동시에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20대가 투표를 하지 않아서 한국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라는 386세대의 속 편한 비난의 뒷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심해볼 것이 하나 더 있다. 본부 점거에 깔려 있었던,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고 학내 민주주의는 쟁취해야 한다는 전제는 과연 지금까지 유효한 것일까? 법인화도 되고 재벌 이사장도 들어온 김에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물음이다. 대학생이, 돈을 지불한 만큼 교육 서비스를 향유하다 떠날 교육 소비자가 대학의 운영까지 관여할 권한과 책임이 있을까?
김상봉 교수가 기업에 대해 주장한 글을 빌려온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기숙사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회사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하루 종일 노동하고 다시 기숙사에서 잠드는 노동자에게 기업은 더도 덜도 아니고 세계이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일상의 삶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로우냐 아니면 얼마나 예속되어 있느냐 하는 것도 기업 내에서 노동하는 삶이 얼마나 자유로우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 살더라도 깨어있는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에서 내가 노예라면 나는 깨어있는 대부분 노예라는 주장이다. 비슷한 말이 학교에도 가능하다. 깨어있는 시간의 3분의 1을 쏟는 학교에서 나의 주권이 무력하다면 나는 3분의 1만큼 노예다. 그렇다면 싸울 이유가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싸운다고, 집회와 투쟁을 한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인용하는 탁월한 대답이 있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데모로 사회는 바뀐다. 왜냐하면 데모를 함으로써 ‘데모를 하는 사회’로 바뀌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대학교로 옮겨온다. 실천하는 학생들이 있는 대학교는 그렇지 않는 학교와 분명히 다르다.
4. 빛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싶었다. 당연히 글 하나를 쓴다고 해서 내 앞길을 밝혀줄 등불이 나타나진 않았다. 약간의 연결 고리들은 드러났지만 그것들이 나를 실천하며 살도록 몰아세우진 않는다. 대학에서 실천하는 친구들을 응원하기엔 충분하지만 내 삶까지 던지기엔 모자란 이유들이다. 학내 실천의 상황은 여전히 열악하다. 사람이 적으니 그 중에 능력을 겸한 사람은 더 적어서 그나마 있던 것들마저 더 나빠지고 있다.
삶 전체를 두고 선택해야 한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는 순간이 좋고 세계가 좀 더 아름다워졌으면 좋겠고 잠드는 순간 돌이켜 보는 매일이 긍정할 만했으면 좋겠다. 학문하는 나와 실천하는 나와 즐거운 일을 하는 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을 그럭저럭은 버는 나. 많은 나들의 교집합이 직업 세계에 한 점으로나마 존재한다면 참 좋을 텐데. 그렇다면 그 점을 향해 달려갈 텐데. 아직 그 점을 발견하지 못해 선택을 미루고 있다.
알게 된 건 긴 시간을 들여 이 글을 썼다는 사실 뿐이다. 쓸수록 괴로워서 몇 번이고 주제를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이 글을 끝까지 썼다는 사실만이 내게 남았다. 대학 내 실천에 대한 지지만은 여전히 철회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털어내려 애썼지만 포기하지 못할 걸 알았으니 이대로 내버려둔다. 당장 조직에 가입한다거나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지는 않겠지만 기회가 다가온다면 무작정 밀어내지는 않을 것이란 예상을 한다.
사회철학을 배우는 수업에서 선생님은 계몽(Enlightenment)의 시대를 빛(Light)의 시대라고 불렀다. 계몽과 반(反)계몽이 교차하는 과정이 곧 근대 사회의 발전 과정이라고도 했다. 계몽주의자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빛이라는 것이 어쩌면 모양만 바꿔가며 여전히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혹시 빛은 내 안에도 심어지는 게 아닐까.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삶을 살든 모양만 바꿔가며 내 곁에서, 늙지 않고 삶과 세계를 밝히지 않을까.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철학을 공부하고 실천을 하고 그들의 편에 설 수 있지 않을까.
허튼 기대다. 직장인이 얼마나 피곤하게 사는지 안다면 감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걸 모르는 나는 내친김에 더한 꿈까지 말해본다. 나는 이 세계에서 숭고한 삶들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숭고에 대한 학자들의 뜻풀이는 많지만, 내가 이해한 숭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여가는 모든 인간적 행위들이었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제 신념을 위해 도전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압도적인 기분이었다. 그런 걸 좋아하는 취향이어서 이런 글을 썼겠지만 숭고한 삶은 줄어들어야 한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사람들이 제 신념을 위해 몸을 태우지는 말아야 한다. 그들 탓이 아니다. 목숨 소중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어서 어떤 사람들은 단식을 하고 심지어는 제 몸에 불을 붙인다. 곁에 빛을 품은 사람들이 좀 더 있었더라면, 제 몸을 태우지 않아도 주변이 밝고 따뜻했다면 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명이어도 덜 죽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그만큼은 해보아야 한다. 숭고 대신 우정과 연대가 빛을 발하는 세상을 바라면서. 당장은 그런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