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21개월

여느 21개월이 지났다. 아마도 잊을 시간이다. 다행한 중에 다만 접어둘 기억들이 있어 기록을 남긴다.

1.

돌이켜보면 논산 훈련소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적어도 군대만 끔찍한 건 아니라는 질 나쁜 확신이었다. 초소 너머 자유의 땅에도 억압들은 적당한 가면을 쓰고 자리하리란 생각이 있었다. 밤새 눈이 쌓여 천장이 코에 닿는 텐트에서 나올 때, 젖은 흙바닥과 손이 함께 얼어갈 때, 믿기지 않는 말놀이에 지쳐갈 때 꽃다지의 <내가 왜>가 떠오르면 잔인하게도 위안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평균적 삶의 궤적 위에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들보다 나아 보였다. 그런 생각은 그간의 정치적 심성을 지키려는 노력이었겠으나 더 큰 불행을 위안 삼는 버릇은 역시 치졸하다.

위안은 나쁜 미래가 되었다. 삶은 이제 모양을 바꿀 것이지만 여전히 지리멸렬할 것이다. 가면 아래 맨살의 끔찍함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사리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달라질 겉모습을 믿고 욕망하는 일은 허망하고 변하지 않을 무의미함 때문에 미칠 수도 없을 때 의탁할 것의 이름을 찾는다. 잘 안 될 걸 안다.

2.

통역과 더불어 미군 자대에서 맡은 임무는 미측 프로그램을 이용해 자료를 보기 좋게 얹어 브리핑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분대장이 되고는 한국군을 대표해 직접 회의와 브리핑을 했다. 시뮬레이션 자료를 받아 요약할 때마다 저 무수한 숫자 속에 피 흘리는 개인에 대한 상상이나 연민이 없다는 게 어색했다. 그러나 유난스러울 것도 없었다. 우리에게 죽음은 여전히 사고로 떠난 이들을 위해 언론이 대신 계산해주는 보험료 따위의 숫자였으므로. 세계는 딱 그만큼 고약하고 그러니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 이런 광경에 매번 놀란 척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진정으로 필요한 건 익숙함과 어색함을 동시에 놓고 시작할 생각들이다.

이름 아닌 숫자로 불리는 순간 질적 존재는 양적 존재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이고 탓할 수 없다. 수단인 동시에 목적인 인간이 되는 경험은 희소하게 찾아들었다. 그런 몇 가지로 삶은 근근이 버텨진다. 길었던 훈련에 스마트폰을 몰래 가져간 후 간이 화장실에 숨어 카톡을 하던 풍경만은 잊지 못한다. 기쁨과 슬픔은 고약한 냄새와 함께 찾아왔다.

3.

좋아할 수 없는 곳에서 가능한 한 열심히 일했다. 훈련 중엔 15시간을 넘게 일하고도 새벽에 깨우면 더 일했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재단하기도 했다. 보상이 없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게을러진 습성이 곧 네 책임감의 미래가 될 거라고. 쓸모를 인정받고 싶었다. 새로운 기획도 벌이고 싶었다. 두 동기가 삶을 추동하는 한에서 앞의 저주는 유효할 것이다. 

한계를 배웠다. 내용에 선행하는 형식들은 생에 그럴듯한 의미를 멋대로 칠할 것이다. 얼마든지 타락한 미래마저 보람으로 착각할 것이다. 그런 동물화를 익혔다. 인간을 도구화하기 위해서는 이념으로 물들이는 것보다 멍청하게 만드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이 조직은 본능적으로 안다.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 예절과 규칙들을 남에게도 가르쳤다. 처음에는 나이를 잊고 아이가 되어 복종했고 몇 개월 만에 기력을 쏟는 청년이 되었으며, 곧 노년이 되어 떠나왔다. 권력의 사이에 서서 한편 평등을 위해 애썼으나 억압을 세련된 방식으로 설득하기도 했다. 그간 세워온 많은 원칙의 바닥을, 제각각일 그 모양을 보고 싶지 않다. 도저히 일반화할 수 없는 개별의 문제로만 덮어두고 싶다. 여태 해 온 말들을 배반하는 욕심인 걸 안다.

4.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작별을 나누었다. 가능한 눈을 마주치려 애썼다. 부대원, 미군 간부, 한국군 간부, 군무원 선생님, 봉사 활동을 했던 아이들과 과분한 감사를 교환했다. 이 사람들과의 경험은 내 생의 흐름과 빗겨나가 있으니 아마 대부분을 잊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퇴색시키지 않는 눈빛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좋은 이별이었음을 믿게 하는 눈들. 그런 것조차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는 눈빛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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