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고 코베인의 가사는 말을 더 보태지 않을 때 뜻으로 더 충만하다. 하지만 그 충만함이 내게 글쓰기를 강요한다. 별 수 없이 조금만 쓴다.
색을 지우고 숨고 싶다는 반복적인 소망 아래 두 가지를 생각한다. 숨어야 하는 사회와 숨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튀면 안 되는 사회는 낯설지 않다. 모난 돌이 정 맞고 가만 있으면 중간은 가지만 혹여나 움직이면 쏘는 사회. 관용구에 담긴 진실만큼 익숙하다. 그러나 절반의 진실이다. 들은대로 배운대로 가만히 있던 사람들을 바다 속에 묻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그런 배에도 사회에도 사람들은 빠르게 익숙해졌다. 숨거나 숨지 않는 사람들을 조롱한다. 권하는 상식을 믿으면 사람들은 즐겁다. 철없는 기쁨이 믿음만큼 주어진다.
믿는 사람에겐 믿고 싶다는 소망이 불필요하다.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이나 기도하고 주문을 왼다. 아무 색도 갖지 않게 해달라고. 이제는 고통을 멈추고 내게도 캐모플라주를 허하라고. 하지만 알고 있다. 신을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끝내 신을 믿지 못할 것을 예감한다는 사실을. 불신자의 기도는 무용하다. 숨어야 한다며 빨간색과 파란색과 노란색을 뒤적이는 사람의 미래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색의 세계를 떠나지 못한다. 다른 곳에 서서 변해간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색에 대한 생각은 계속된다. 그런 자신을 조망하는 한 그는 색의 세계에 산다. 분명한 하나의 색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눈이 시린 그 색에 익숙했던 사람이라면 그 생생함을 잊을 수가 없다. 제 과거가 그런 운명을 짊어지게 만든다. 내겐 그런 사람들의 노래로 들렸다.
숨겨야 하는 색들이 내겐 정치적 정체성으로 읽혔다. 그걸 억지로 잊으려는 사람들에게서 주제 넘게도 과거의 활동가들, 지금은 생활인일 사람들의 삶을 떠올렸다. 더 주제 넘게도 이런 주제의 글을 쓴 적도 있다. 꼭 일주일 전 일이다. 이 노래를 두고 더 하고 싶은 말도, 기대도 다짐도 그 글에 담겨있어서 아래에 옮겨온다. 색 이후의 빛에 대한 글이다.
「늙지 않을 빛을 곁에 두기: 대학과 실천과 꿈에 대한 단상」
가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데, 보컬 깜악귀가 돌아와 다행이다. 나머지는 음반 이후에나 말할 생각이다.
눈뜨고 코베인, <캐모플라주>, 《Skyland》,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