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의 결론들

한 학기 동안 여러 글을 썼다. 학부생 나부랭이가 마감에 쫓겨 종이와 데이터 패킷과 기타 등등을 낭비해 출력한 활자 뭉치를 글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렇다. 이런 것들이 남았다. 

  • 늙지 않을 빛을 곁에 두기: 대학과 실천과 꿈에 대한 단상
  • 학문적 솔직함과 공공성의 곤경
  • 나는 무엇을 할까: 고백과 오해와 불만 이후 이론의 쓸모
  • 니체 철학의 위치와 효과: 경계 위에서 매개하는 몸
  • Existentialist Ways of Living: not as an Ontology nor an Epistemology but as an Ethics
  • 계몽의 꿈은 사라진 후의 인간에게도: 삶의 기술로서의 계몽주의
  • 활동가를 위한 철학: 서울시청 점거 사례를 중심으로

배운 건 달랐지만 그 끝에 내놓은 글들은 비슷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한없이 시시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론은 저 윤리적 물음에 구체를 더하기 위해 요청되었다. 세계는 대체 어떤 모양으로 망해 있는지, 그 안에서 나는 얼마나 무력한지, 그럼에도 고를 실천의 전략은 무엇인지, 하는 것들을 알기 위해 읽고 썼다. 단 하나의 길을 구하는 게 목표였다면 당연히 실패했다. 그걸 알면 벌써 했지. 보다시피 나는 연말 분위기에 올라타서 이런 회고나 쓰고 있다. 

이론의 유행을 주워섬기지 말자는 교훈만은 얻었다. 지젝과 바디우가 꽂힌 책장에 들뢰즈와 루만을 끼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행은 이론적 돌파와 관련이 없다. 당연히 실천과도 무관하다. 미시 정치를 비웃고 공산주의의 이념을 발화한다고 해서 급진적인 건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따질 것은 효과다. 제 삶을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여러 태도를 전략적으로 조립해야 한다. 누구도 내 판단의 후견인(I. Kant)으로 삼지 않으면서. 

그렇게 내 삶에 미칠 효과를 상상하며 글을 썼다. 세계 이해의 엄밀함에는 자신이 없지만 결론만은 남겨두어야 해서 몇 개의 결론을 옮긴다. 

결론 하나

곤경 속에서도 가망은 있다고 항변하기 위해 썼다. 

의문은 꼬리를 문다. 루만의 말대로 사회적 체계의 작동 자체와 무관한 인간은, 들뢰즈의 말대로 다른 존재자들에 비해 존재론적 우위를 지니지 못한 인간은 어떤 유의미한 실천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은 다만 유전자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사라질 뿐인 DNA의 숙주, 세계적 숙명이라는 거대한 조류를 따르는 한 줄기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비인간주의 이론의 끝은 존재론적·인식론적 비관에서 이어진 윤리적·정치적 무력함일까? 실천의 꿈을 여전히 갖고 있는 사람은 비인간주의 이론 이전으로 퇴행하는 한에서만 자신의 실천성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모든 의문에 ‘아니오’라고 답해야만 한다. 비인간주의 이론이 보인 사회상에 타당성이 있는 한, 우리는 비인간주의 이론이 없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비인간주의 이론을 선택하는 인간 역시 제 삶을 어떻게든 꾸려야만 하는 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뭘 해도 안 된다’는 답 이상을 내놓아야만 한다. 그리고 내가 구체적인 사회의 정치적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때 내 삶을 구성하는 일은 정치적 문제와도 무관할 수 없다. 요컨대 사회적 개입의 불가능성이란 아포리아에 맞서 비인간주의 이론 내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실천의 가능성을 도출해내야 한다.

당연히 답은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루만과 들뢰즈 중 누구도 실천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작동에 있어 인간의 심리적 체계가 ‘블랙박스’라는 루만의 표현은 인간의 심리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뜻이지, 인간의 심리가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뜻은 아니다. 환언하면 인식론적 불가능성일 뿐 실천적 불가능성은 아니다. 잘 알지 못하기에 최상의 실천 전략을 짜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사회 변혁의 가능성은 가설의 형식으로나마 제시된다. 

결정론적 세계관에 맞서 우연과 생성의 세계관을 지지하는 들뢰즈는 더 적극적으로 실천의 가능성을 옹호한다. 설령 인간보다 사회체가 선행하며 인간이 사회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더라도 인간은 우주적인 생성의 힘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통해 인간은 다른 존재자보다 우월하지는 않더라도 변화를 만들 힘만은 여전히 지닌 존재가 된다. 추상적인 서술이어서 무력하게까지 느껴진다. 낙관과 확신의 정조는 여기에 없다. 그러나 사회적 실천의 가능성이 부정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주어진 조건은 다음과 같다. 삶의 의미를 규정한 초월적 의미를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사회적 조건에 순응하고 살아갈 수도 없다. 내용도 결과도 예측할 수 없는 실천의 가능성만이 조각처럼 주어져있다. 여기에서 계몽주의는 이 가능성의 조각에 삶을 던지는 삶의 기술로서 재등장한다. 제 삶의 의미를 만들기 위해 앎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재구성한다는 차원에서 계몽주의는 다시 역할을 갖는다. 계몽주의를 밀어붙이면 좋은 세계가 올 것이라는 낙관 때문이 아니다. 잘 알고 잘 행하려 애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결론 둘

그 가망 안에서 확신하는 것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여러 차례 인용한 문단들로 답한다. 

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은 결코 하나의 이론, 하나의 교의, 또는 축적되는 지식의 영원한 집합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우리가 있는 바]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한계들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자 그 한계들을 넘어설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 되는 하나의 태도, 하나의 에토스, 하나의 철학적 삶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M. Foucault)

실험은 유일하고 고유한 답이라는 권리를 지니지 않는다. 절대적 앎을 무기로 삶을 급진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매번 주어지는 사소한 국면들 속에서 저마다 무엇이든 배워야 하며 무엇이든 행해야 한다. 시시한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전략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적은 복용량. ― 〔병에 걸린 몸을〕 가능한 한 깊숙이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약을 극소량으로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한다! 어떤 위대한 일이 단번에 성취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길들어 있는 도덕의 상태를 성급하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가치 평가와 바꾸지 않도록 주의하려 한다. (F. Nietzsche)

서울시청 점거 사례에도 실마리는 있었다. 점거라는 실천 방식 자체가 우정과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변화를 타인의 변화로 전파하는 손쉬운 방법은 감기 바이러스의 전략을 따르는 것이다. 그들과 몸을 맞대고 삶의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위대한 철학을 특강으로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철학을 살아내는 몸을 보여주며 믿음을 쌓는 일이다. ‘저희 투쟁 현장에서도 성소수자 분들 많이 만났었다’는 현장의 연대사가 증거다.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역시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던 사안들에 개입하며 쌓은 우정이 있었기에 성소수자가 아닌 이들도 점거에 참여했다. 이번 서울시청 점거를 통해 만난 각 영역의 활동가들은 아마 미래의 다른 사태에서도 연대할 것이다. 연대는 초월적인 이념이 아니라 서서히 무르익는 우정에서 비롯한다.

조급한 마음에 과거로 돌아가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만으론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없다. 이론의 깃발을 들고 현장에 나타나는 식으로는 안 된다. 몸의 문제다. 이론을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사는 몸들이 만나 빚은 우정만이 전에 없던 권력관계, 전에 없던 우주적 생성에 가닿을 것이다. 다른 세계를 살고 싶다는 소망은 그렇게 실현된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극소량으로,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결론 셋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살기로 했다. 

기껏해야 4년 남짓 대학을 다닐 내게 이론의 곤경을 논할 자격이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내가 안다고 믿는 이론 대부분을 오해하고 있을 것이며, 세계 속 무수한 이론 대부분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로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론가의 덕목이 겸손이라면 무식한 사람의 덕목은 용감함이다. 이론을 업으로 삼지 않을 나의 이론 읽기는 더 오만하고 건방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시한 인간에 불과한 나의 말과 행동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클 수 없음을 알 때, 일단 뭐든 읽고 쓰면서 살아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갖춘다면 더 그럴듯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절망적인 삶 앞에서, 거리로 내몰려 핍박받고 조롱당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될까. 역시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답이 없다는 걸 알아서 뭐든 해볼 수 있다. 집회도 해보고 예술도 해보고 이론도 해보고 이것저것 해봐도 틀렸다고 혼낼 사람이 없다. 몇몇 정치철학자들의 기대처럼 정치적 변화가 어느 날 갑자기 도래한다면 그건 아무렇게나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뻘짓들이 빚어낸 영문 모를 작용일 것이다. 그때까지 지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살게 될 것이다. 허망한 기대다. 그러나 혁명을 못 보고 죽게 되더라도 혁명의 꿈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 사실만은 허망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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