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갖는다는 것

1. 

태어난 지 백일이 좀 덜 된 조카를 보러 두어 번 진해의 큰누나 집을 들렀다. 아기가 잠든 밤에 자형과 술을 마신 날이 있었다. 자형은 술을 잘 못 마시는 탓에 얼굴을 금방 붉히면서도 그럴듯한 안주를 내려고 애썼다. 그래 이제 처남은 무얼 할 생각인가, 따위의 먹고살 계획을 물어왔다. 갓 복학해 아직은 잘 모르겠단 핑계로 물음을 되돌려주었다. 자형은 더듬더듬 계획을 짚어갔다. 너희 누나 일도 그만두는데 나라도 열심히 벌어야지, 그래서 애 크면 집도 차도 바꿔야지, 그래서 자기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삶을 선물해야지. 온통 그래서로 이어지는 그의 미래는 아이의 생애 주기만을 따라서 건축되고 있었다. 

살 이유를 찾기 힘든 시절을 보낸다. 어디 나만의 일일까. 이토록 무의미한 세계에서 오로지 자식만은 죽지 않고 버텨내기를 강요한다. 아이는 그렇게 생의 의미를 대신하는 만큼은 신이다. 그런 부부 둘만의 종교가 부럽고 또 두려웠다.

밥벌이는 위대하다. 제 삶으로 그것보다 많은 삶을 꾸릴 조건을 만들기에 그렇다. 모든 위대한 일은 밥벌이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은 완성이 아니다. 밥벌이가 위대하다는 말이 무기력한 삶에 무수하게 건네는 위안을 여전히 경계한다. 알고 있다. 허튼 소리다.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 생의 완성 따위를 운운할 수는 없다. 아직 밥을 벌어 먹어본 적이 없는 학생이어서 하는 말이다. 시덥잖은 소리인 걸 알면서도 아직은 학생이어서 아직은 포기하지 못한다. 그렇게 아이는 구원인 동시에 원죄인 반인반신이 된다. 

2.

시월 십 일엔 〈나도 그럴 수 있을까〉라는 곡이 나왔다. 리미가 남수림으로 이름을 바꾸고 낸 노래 중에서도 유독 느리고 반성적이다. 남수림은 창밖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자문한다. 나도 그 누군가의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지난날에 저지른 실수들이 그 아이에게까지 닿진 않을까, 미숙한 인간인 나의 안에 다른 하나의 삶을 담을 수 있을까, 나 홀로 감당해야 하는 그런 아이라도 난 사랑할 수 있을까.

지나친 자조다. 모든 위대한 일들이 시시한 개인들의 몸을 빌려 이뤄진다는 걸 안다면 저렇게 겁낼 건 없다. 그렇지만 쉽게 외면할 수도 없다. 사내인 내 몸엔 담기지 못할 아이에게, 그 아이를 담을 사람에게 다해야 할 책임들을 떠올린다. 의미니 가치니 하는 말에 삶을 던져선 안 된다는 판단이 선다. 그렇게 하나씩 포기하면 멋대로 밀려갈 삶인 걸 알면서도. 

3.

변증법을 믿지 않아서 둘을 합쳐 유려한 결론을 내리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예감하지도 말아야 한다. 논리적 가능성을 가늠하기도 전에 움직여야 한다. 여태 이것 말고는 아는 게 없다. 길지 않을 실험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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