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전화로 소식을 듣고 저 문장을 떠올렸다. 문장을 만들기 전의 기분이 기억나지 않는다. 비극은 말이 될 때만 슬퍼졌다. 문장만이 눈물이 되었다. 엄마랑 누나랑 김치찌개를 먹다 울었고 울지 않으려고 목덜미를 자꾸 쥐어뜯었다. 어떤 노래를 들어야 좋을지 몰랐다.
도망치고 싶었다. 다른 세계로 숨고 싶어 소설을 읽었다. “오늘밤에 월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오제가 말했다.” 고작 월식이란 낱말 하나에 여러 소망을 덧붙였다. 삶이 월식 같다면. 확률은 희박하더라도 아귀만 잘 맞으면 정말로 반복되는 것이 삶이라면. 나와 나의 아버지도 다시 한 줄로 나란히 서게 있다면. 욕심을 좀 더 부려 그때는 내가 아버지일 수 있다면. 내가 먼저 정을 주고 속을 썩일 수 있다면. 그러고도 속절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그가 내게 진 빚을 그렇게 되돌려줄 수 있다면.
가족
제희네 부모님, 특히 제희네 어머니는 예민하게 들뜬 채로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 아무것도 아닌 말이 꼬투리가 되었다. 제희네 아버지가 소음이 신경쓰이니 에어컨디셔너를 좀 끄자고 말하자 나머지 사람들은 이 더위에 어쩌라는 것이냐고 쏘아붙였다. 제희네 아버지가 그러냐고 웃으면 그게 웃기냐고, 왜 우습지도 않은데 웃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 제희가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해가며 둘 사이를 달래는 동안 나는 조수석 모서리를 손으로 붙들고 있었다. 고집스럽고 뜨거운 것을 무릎에 올려두고 앉은 기분이었다. 파도를 수차례 타고 넘는 것처럼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나아가는 길이었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은 꼭 소풍날 싸운다. 온 힘을 다해 싸운다. 그날만은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 하니까. 그러지 않으면 참아온 지난날이 못 견디게 억울해지니까. 그게 소풍을 망칠 걸 알면서도. 무안하고 슬퍼질 걸 알면서도. 꼭 그래야만 애틋할 수 있는 사이인 것처럼.
황정은. (2016). 아무도 아닌. 파주:문학동네.
소히, 〈산책〉, 《Mingle》, 튜브앰프, 2010.
이소라, 〈Alone Again〉, 《My One And Only Love》, 세이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