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색의 신을 부르는 마음들: Candomblé의 세 노래

지난 유월, Bahia를 찾았다. 색색의 옷을 입은 옛 종교의 신들을 보며, 이들을 기리는 마음의 배후를 다시 궁금해했다. 종교와 과학에 잠시 눈감고 미신을 두드리는 무른 심정들. 푸념하고 복을 빌고 다짐하는 그 마음을 노랫말로 다시 읽었다.

‘형틀’이란 뜻을 지닌 Pelourinho 광장의 도로. 흑인 노예를 처형하던 곳이 이제는 문화유산이자 관광지가 되었다.

색색의 신

지난 유월, Bahia를 찾았다. 브라질의 첫 수도, 식민지 무역의 거점, 숱한 예술을 낳은 땅을 눈에 담고 싶었다.

숙소 주인의 추천으로 한 공연을 봤다. Bahia의 유산을 담은 민속 무용 공연이라고 했다. Capoeira* 무용수들이 Berimbau** 연주에 맞춰 춤을 췄고, 색색 옷을 입고 브라질의 신을 연기했다. 푸른색은 철과 문명의 신, 붉은색은 폭풍과 변화의 신, 초록색은 숲과 사냥의 신, …. 처음 만난 신들이 단단한 몸짓으로 울렁거렸다.

* Capoeira: 격투기, 춤, 음악이 결합한 브라질의 예술 형식. 아프리카 앙골라 지역의 흑인 노예로부터 전해졌다.
** Berimbau: Capoeira의 리듬을 담당하는 단현 활현악기. 

Balé Folclório da Bahia

덕분에 오래 묵은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브라질은 가톨릭의 나라라던데. 이 신들은 대체 다 무엇인가. 이들은 어째서 불경한 우상이 아닌 생생한 상징인가. 노래로 예술로 이들을 기리는 마음의 배후엔 무엇이 있나.

기도하는 마음들

신들의 출처는 Candomblé. 브라질의 옛 종교였다.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신앙이 브라질에 이르러 종교의 형태를 갖췄다. 빼앗긴 고향을 기억하려는 안간힘이었다.

그러나 신의 모양은 변해갔다. 아프리카의 신에 인디오의 자연관이 덧입혀졌다. 가톨릭의 탄압을 피하려다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도 빌려 썼다. 그렇게 이들은 점차 절대자에서 문화적 상징물이 되어갔다. 신비롭고 강렬하되 실체는 모호한, 그래서 뭐든 담아도 그럴듯한 튼튼한 그릇으로.

그런 그릇에 물을 떠다 기도하는 마음이라면 낯설지가 않다. 종교와 과학엔 잠시 눈감고, 미신을 두드리는 무른 심정들. 누구든 붙잡고 푸념을 늘어놓고, 복을 빌어보다, 다짐으로 돌아서는 순간들.

노래들

좋아하는 노래들에서 그 마음을 찾았다.

우선 59년 Dorival Caymmi의 〈Dois De Fevereiro〉. 노래는 바다와 모성의 신 Iemanjá을 손에 닿는 일상적 존재로 그린다. 화자는 신에게 쪽지를 건네며 답을 구한다. 여기서 신의 역할은 듣고 답하는 친절.

다음은 66년 Vinicius de Moraes와 Baden Powell의 〈Canto de Xangô〉. 노래는 토속적인 리듬으로 천둥과 정의의 신 Xangô를 소환한다. 화자는 사랑이 고통임을 알면서도 신에게 사랑을 구한다. 이제 신의 할 일은 일생의 구원을 선물하는 일.

끝으로 67년 Nara Leão의 〈Esse Mundo É Meu〉. 여기엔 독재 정권에 맞서던 예술가의 결의가 담겼다. 화자는 자신을 노예라 칭하며 전쟁과 문명의 신 Ogum을 호명한다. 신을 빌미로 ‘세상은 나의 것’이라 선언하고, ‘신이 오지 않으면 직접 싸우겠다’고도 다짐한다. 따라서 필요한 건 든든한 뒷배로서의 신, 언제고 꺼내 쓸 상징적인 권능.


유일신을 믿으며 신의 다원성을 곁에 두는 브라질이 궁금했는데. 풀어 읽은 심정은 한국에서 보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유일신을 믿다가도 신년 운세는 챙겨보고, 무신론을 품고도 복을 바라는 그런 순간들.

대체로 천진하고 때때로 가여운 마음이어서 차마 미워할 수가 없다. 그런 마음은 나보다 남을 향할 때 더 애틋한 것이어서 노랫말을 옮겼다.


Dois de Fevereiro 2월 2일

Gal Costa의 버전으로 옮긴다.

Canto de Xangô 샹고의 노래

Esse Mundo É Meu이 세상은 나의 것

작곡가인 Ségio Ricardo의 2019년 공연에서 딸 Marina Lutfi가 부른 버전으로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