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음악을 다루는 순간만큼은 아름다움에 천착하고 싶었다. 궂은 연말, 계엄 선언과 탄핵안 가결을 겪고도 결말을 모르는 12월에도. 미를 좇는 일이 한갓지다는 내 안의 의심에 맞서 아름답고 치열한 옛 노래를 옮긴다. 미와 옳음이 둘이 아니던 시절, 오래된 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브라질의 저항 가요를 자주 듣는다. 비슷한 때에 비슷한 정치를 앓아 훌륭한 노래가 많고 나는 아름다움이 선량함과 옳음 사이를 맴도는 일을 사랑한다. 그 마음을 모두와 나누려는 가요의 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노랫말을 이미 많이 옮겼다.
Elis Regina, 〈Como Nossos Pais〉
투쟁가도 후일담도 불가능한 시대에 쓴 실패의 기록Ivan Lins, 〈Novo Tempo / Fim de Ano〉
캐럴이 되어 연대를 다짐하는 민중가요João Bosco, 〈O Mestre-Sala Dos Mares〉
오지 않은 현실을 역사에 빗대어 그리는Simone, 〈Tô Voltando〉
노래는 무엇으로 무기가 되는가Noel Rosa, 〈Onde Está a Honestidade?〉
낡지 않을 무구함으로Milton Nascimento, 〈Maria, Maria〉
삶에 믿음을 갖는 이상한 습관Gilberto Gil, 〈Roda〉, 〈Cérebro Eletrônico〉
유목하는 식인주의, 근사한 형식이자 민중의 정치
다만 고백하자면 적이 분명한 노래를 즐기지는 않았다. 선악이 또렷할수록 멀리했다. 우리는 지난한 진창에서 간신히 선할 수 있는데. 악인을 핑계로 복잡한 전선과 소수의 사정에 눈감는 마음이 마뜩찮았다. 직설과 풍자의 쾌감엔 그만한 부채가 뒤따를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군가풍의 투쟁가들을 사랑한다. 김호철의 〈단결투쟁가〉, 안치환의 〈철의 노동자〉, 최도은이 부른 〈혁명의 투혼〉이나 〈인터내셔널〉 같은. 선악은 흐려도 눈앞 장벽만은 또렷할 때, 약한 다수를 모으는 노래의 힘을 모르지 않는다.
Chico Buarque도 그런 노래를 썼다. 정권을 피해 떠났던 망명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Apesar de Você〉, “당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사랑 노래란 핑계로 검열을 통과했지만 듣는 이들은 알았다. 노래 속 부조리한 당신이 누구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날을 희망하는 마음은 어땠을지.
Chico의 무기는 삼바였다. 그는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군중 속에서 당신을 노려본다. “나는 당신에게 물어, 어디로 숨을 거냐고 / 이 엄청난 고양감으로부터” 곳곳에 중의적인 말놀이와 근사한 라임을 심으면서도 그는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았다. 민중은 여러 모양으로 슬픈 얼굴들이 손잡은 무리일 때 가장 강하다. 아마 Chico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2024년의 한국이 70년대의 한국, 브라질을 닮았다니. 가여운 일이지만 덕분에 우리는 이미 답을 안다. 광화문에서 삼바를 부르지 않아도 괜찮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우리의 옳음을 증언하는 것을 알았으니. 지구 한 바퀴어치의 용기를 얻었으니 주저 없이 옳은 길을 따를 수 있다.
틀린 일에는 선명한 반대를. 동시에 손잡은 동지의 상처를 상상할 줄 아는 정교한 언어를. 그런 다짐으로 가사를 옮겼다.
〈Apesar de Você〉엔 이미 좋은 우리말 번역이 있다: 브라질 소셜 클럽, 「그럼에도 새벽은 온다, Apesar de Voce」. 구태여 다시 옮길 이유를 고민했지만, 다른 말맛으로 여러 번 옮겨 여러 번 읽히게 하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