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게 상실과 용기와 겸허를: Adriana Partimpim의 동요들

대중음악가의 동요를 좋아한다. 평소보다 품을 들여 친절해진 작은 세계들이 좋았다. 학교에서 배운 김민기의 〈백구〉. 어릴 적 누나가 불러준 산울림의 〈산 할아버지〉. 계피의 목소리로 처음 들은 〈봄〉 같은 노래들. 동요라 해서 맑고 고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 곁에 웅크리고 앉은 설움들도 있었다. 일 떠난 엄마와 홀로 남은 아이(섬집 아기). 못 가진 강변을 그리워하는 마음(엄마야 누나야). 어린이의 영토는 […]

삶에 믿음을 갖는 이상한 습관: Milton Nascimento,〈Maria, Maria〉

나는 이 노래를 Mercedes Sosa의 목소리로 처음 들었다. 아르헨티나의 민중 가수가 부르는, 뜻을 몰라도 뜨거워지는 노래로. 멋대로 거룩한 이야기를 상상했다. 마리아는 성모의 이름이니까. 높고 귀한 힘을 구하는 해방 신학의 심정으로 어림했다. 한참 후에야 알았다. 이 노래의 부모는 투쟁도 종교도 아니었음을. 그저 브라질의 외진 곳에서 스러진 이의 이야기였음을. 그럼에도 숭고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떤 슬픔은 동지와 신의 몫까지 대신한다는 것을.

낡지 않을 무구함으로: Noel Rosa, 〈Onde Está a Honestidade?〉

낡은 사진으로 그를 만난다. 음원 플랫폼에 쌓인 컴필레이션 음반 속 흐린 초상으로.  말끔히 빗어 넘긴 머리, 말간 얼굴에 또렷한 코. 다만 태어날 때의 사고로 비뚤어진 턱. 카메라 너머 공허를 응시하는 듯한 시선. 요컨대 신사적이지만 어딘가 낯선 경계인. 그런 생애였다. 그는 모자람 없는 집에서 태어났으나 술과 음악의 편이었다. 카니발을 뒤흔든 작곡가였으나 빈민가의 음악가와 어울렸다. 결핵을 앓고도 […]

사랑은 추상으로 무한히: 〈Um Dia De Domingo〉

85년 9월, 대단한 두 사람이 만났다. 문화 운동 Tropicaliá의 목소리이자 팝 디바였던 Gal Costa. 브라질 팝에 소울과 훵크를 들여왔던 당대의 아이콘 Tim Maia.  대단한 둘이 평범한 노래를 불렀다. 제목부터 〈Um Dia de Domingo〉, ‘여느 일요일’이었다. 편곡은 브라질보단 미국의 발라드에 가까웠고, 구성과 멜로디는 단순했다. 그저 시절의 관행이 빚은 가요처럼 들렸다. 가사도 단순했다. 헤어진 연인을 향한 구애가 […]

삼바는 기쁨의 아버지, 고통의 아들: 〈Desde Que o Samba é Samba〉

“그래서, 삼바가 대체 뭐야?” 이런 질문 앞에선 매번 말을 잃는다. 오래 품은 짝사랑도 소용이 없다. 이 장르의 역사, 퍼커션의 켜가 빚는 폴리리듬, 자주 쓰이는 악기나 음계 따위를 더듬거릴 뿐, 명료한 한 줄 요약에는 늘 실패해 왔다. 어쩌면 오래된 아름다움의 숙명 아닐까. 말뜻을 구하는 게 애호가의 일이라면 그로부터 도망치는 건 예술가의 일이므로. ‘예술’이나 ‘음악’처럼 거대한 단어, […]